오늘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리사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물론 지난 며칠 간 복음에 나왔던 니코데모라는 바리사이도 있고,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 식사대접을 한 바리사이도 있긴 하지만
복음을 보면 대부분의 바리사이가 주님의 적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중에서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말리엘은
참으로 신중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신앙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도 그의 문하생이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자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바리사이를 도매금으로 나쁘게 얘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말리엘의 제자였는데
어찌 스승과 달리 주님의 적대자가 되었을까?
나도 부지불식간에 주님의 적대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먼저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봐야겠습니다.
스승 가말리엘은 사도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어찌 사도들을 박해하였을까요?
제 생각에 바오로 사도는 우선 너무 젊었고,
너무 열심하고 자신만만하여 신비에 열려있지 못해서 그랬을 겁니다.
어쩌면 가말리엘도 젊었을 때는 바오로 사도처럼 그랬을 텐데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알고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너무 확신이 커서
자기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모르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자기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믿음이었거나 자기를 믿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오로 사도보다 신앙심이 훨씬 보잘것없는 저를
한 번 제대로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하느님께 의도적으로 대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하느님께 대적치 않고 다만 사람과 대적했을 뿐인데
사람에게 대적한 것이 하느님을 대적한 것이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평양에 종합복지관인 ‘평화봉사소’를 세울 때 저는 이 사업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건지 욕심 때문에 억지로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수차례 북한의 미사엘 발사나 협상결렬과 같은 암초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가말리엘의 말처럼 제가 하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면
아무리 어려움이 많아도 결국은 평화봉사소가 문을 열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제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될 거라 생각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다른 중요한 난제들은 다 풀렸는데
마지막으로 복지관의 이름 때문에 또 결렬될 형국이 되었습니다.
다시 또 끝장이라 생각하고 사업을 정리하고 있는데 보름 정도 지나
북에서 다시 연락이 왔고, 더 높은 간부가 타협점을 제시해 온 겁니다.
공산당 간부라고 하면 다 인민을 착취하는 빨갱이 나쁜 놈들뿐이고,
나만 하느님 사업의 도구이고 그들은 방해자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들도 하느님 사업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을 당신 도구로 쓰시는데
저는 인간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넓은 뜻을 모르고
하느님 사업을 접으려고 했고, 하느님 사업의 적대자가 될 뻔 했습니다.
하느님 따로 사람 따로 대할 때,
하느님 상관없이 내가 뭘 할 때,
그때 나도 모르게 하느님과 대적하게 된다는 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