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바르나바의 조카이고, 바오로 사도의 조력자였으며,
베드로 사도의 제자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바오로와 베드로 두 사도와
이토록 밀접한 관계였던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대단한 두 시어머니 밑에서 힘들었겠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두 스승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 좋았겠다고 해야 할까요?
인간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할까요,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할까요?
목장지패木長之敗요, 인장지덕人張之德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큰 나무 밑에 있으면 작은 나무가 해를 입거나 죽게 되지만
큰 사람 밑에 있으면 사람은 덕을 본다는 얘기지요.
그렇습니다.
마르코는 위대한 두 사도 밑에서 큰 덕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덕을 본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마르코와 바오로 사이는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마르코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1차 전교여행 중 예루살렘으로 간 적이 있고,
이 때문에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바오로는 마르코의 동행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가 심한 말다툼 끝에 갈라서게 되지요.
이렇게 되었으니 마르코 복음사가는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렇지만 마르코의 위대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고 영적 성장에로 나아간 점입니다.
깐깐한 바오로 사도의 거부로 2차 전도여행에는 동행치 못하게 되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 골로새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마르코 복음사가가 바오로 사도와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베드로 사도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복음서를 최초로 쓰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런 마르코를 베드로 사도는 매우 아껴서 “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 역시 인간적인 가까움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마르코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택된 마르코인데 누구에게 선택된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에게 선택된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선택된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안에 친소관계도 있고, 갈등도 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바오로 사도가 비판하듯 아폴로 파니 바오로 파가 있을 있습니다.
이럴 때 이런 문제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조정하거나 풀려고 하지 말고
모두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존재라는 것에서부터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런 인간적인 갈등의 한 가운데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복음을 기록하고 우리에게 전해준 분입니다.
우리도 수많은 인간적 갈등을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의 복음을 기록하고 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데레사 복음사가,
아네스 복음사가,
아오스딩 복음사가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