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첫 번째 공의회로서
교회가 쪼개지는 위험을 막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만일 사도회의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과 같은 결정을 했다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중심으로 한 이방 그리스도교는 갈라져 나갔을 겁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다.
건강한 보수는 좋은 <옛것>을 지키는 것이고,
올바른 진보는 좋은 <새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는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되고
그저 옛것만을 고집하는 수구일 때 나쁜 것입니다.
수구란 좋고 나쁜 것을 가리려고도 않고, 가릴 줄도 모르기에
옛것은 무조건 좋고 새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이런 수구守舊를 비하하여 우리는 수구꼴통이라고 하지요.
요즘 문제가 되는 <어버이 연합>, <어머니 부대>의 사람들이
이런 부정적인 수구의 한 예인데 이들은 가치판단을 상실한 채
진보적인 소리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를 하고,
사악한 정치꾼들은 이들의 그 무모함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지요.
그런데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이런 면에서 수구적인 유대주의를 잘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다시 말해서 새로운 상황에 맞게 제시하는데
지금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그 결정이 참으로 어설프고 이상합니다.
사도회의는 편지에서 먼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결정하였습니다.”
사도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의 지혜를 모아 결정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여 결정한 것은 더더욱 아니며,
공동체가 성령과 함께 결정하였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함께 결정한 것이 참으로 어설프고 이상합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니까 삼가야 할 것 세 가지만 제시하는 것입니다.
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
2)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3) 불륜
성령과 함께 내린 결정이 고작 이 세 가지입니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고 이렇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입니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힘을 합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자,
뭐 이런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은 하지 말자는 것이 고작입니까?
제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 이런 것입니다.
미워하지 말자는 그런 태도 말입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치 않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그렇다면 사도회의의 결정은 진정 소극적인 결정인가요?
성령과 함께 내린 결정이라면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고
적극적인 결정이고 자유를 주는 결정일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아오스딩 성인의 말이 있습니다.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그러니까 사도회의의 결정도 삼가야 할 세 가지 외에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자유를 주는 결정입니다.
이런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인정했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어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연설을 했지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실상 성령을 받은 사람은-받은 것이 성령이라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도 사랑일 것이기에 자유롭게 해도 됩니다.
사랑의 성령이시기 때문이고,
사랑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자유, 성령의 자유를 사시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