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태초의 창조주 하느님 (The ancient of days : 1794)
작가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1827)
크기 : 동판화에 수채 23.3 X 16.8 cm
소재지 : 영국 런던 대영 미술관
종교 특히 기성종교가 심각한 퇴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성장 과정에서 정착된 전통이나 교리를 더 강하게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신자들의 이탈 현상은 더 심각하다.
유럽에서 대종이었던 우리 가톨릭 개신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심각한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기성 종교의 퇴락 현상과 반대로 어이없는 신흥 종교나 유사종교가 사람들을 모우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거나 입교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에 내부 요인의 하나는 제도적인 종교가 표현하는 신조나 교리에 있어 경직성이다.
현대처럼 변화의 템포가 빠른 세상에서 기성종교가 강조하는 많은 신조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착오적인 표현으로 남게 마련이고 이것이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교회를 떠나게 만들고 있어 이 부분에서 교회의 각성이 아쉬운 현실이다.
한마디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 현실은, 아이는 자랐는데, 과거에 입던 옷을 입힘으로 크기가 맞지 않아 터지는 것과 같은 현실이, 퇴락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는 오늘 기성 종교의 모습이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크리스천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사람이다. 별반 교육적 기반도 없는 처지에서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가까이 했던 책은 성경일 만큼 경건한 환경에 자랐고, 또 신비함을 추구하기를 좋아 하는 천성 탓인지 4살에 이미 어떤 신비 체험의 기억이 있을 만큼 경건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작가가 람베르트(lamberth)에 있던 집에 머물던 어느 날 계단을 응시하던 중 그가 받은 신비 체험을 작품화한 것이다.
하느님으로 보이는 노인이 컴파스를 들고 줄을 긋는 자세이다. 생명을 상징하는 붉고 노란 색깔이 어둠의 암흑에서 더 빛을 더하고 있는 것은 생명이 주는 생기의 실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검은 주위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심연(ex nihilo)을 표현하고 있다. 창조 이전의 암흑 무(無), 혼돈에 대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서에 어릴 때부터 심취했던 작가는 성서 학자나 교회가 가르치는 신조대로 하느님을 읽지 않고 작가 나름대로 기도하는 가운데 들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로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이것을 작품을 통해서도 표현하게 되었다.
작가는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한 대단한 신뢰가 있었고 자신의 영적 생활을 통해 자주 표현했다.
여기에 흰 수염의 노인으로 표현된 하느님은 작가가 심취했던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이면서도 작가가 신비체험이나 환영 안에서 만났던 희랍 신화에 나타나고 있는 제우스신과도 같은 존재로, 작가는 우리젠(Urizen)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에 관한 것을 창세기에서 보다 잠언에 나타나는 다음 말씀에서 영감을 더 받았다.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으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 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8,23-27)
작가의 천지 창조에 대한 견해는 성서의 내용을 사진처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을 상식으로 여기던 것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으며 나름대로 독특한 신앙 체험을 가미하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신앙 안에서 영글은 신비체험의 강조는 세상에 악에 대해서도 전통교리와 좀 차이가 나는 면을 보이고 있다. 악마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오류에 빠져 있을 때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제도적인 종교가 주는 틀 속에 짜인 사고방식에 젖은 기득 세력들에겐 큰 반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으나, 원채 자기 작품 활동을 통해 신앙을 고집하며 살았다.
그가 일생을 개인의 신앙 안에서 발견하고 체험했던 신비스러운 광기는 딱딱한 교리 체제를 수용하지 못하고 식상한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작품은 크리스천 신앙 표현의 유연성을 키우는데, 신앙의 내용은 동일하고 불변이지만 그 표현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해야 하며, 이 다양성 안에서 개인의 신앙체험을 존중하는 것이 오늘의 신앙 쇄신에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교종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세계 예술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성서의 첫 장은 하느님을, 작품을 창조하는 모든 사람의 본보기와 같은 분으로 제시합니다. 장인(匠人)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폴란드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조주 또는 창조자(Stworca) 와 장인 (tworca)의 어휘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991년 부활절 편지: 서울 가톨릭 미술가 협회 번역문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