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머리에 콕 박히고 마음에 와 닿는다.
사실 말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말이 그럴진대 하느님의 말씀은 더 그렇다.
그러므로 오늘 신명기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아무리 우리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들으려는 우리의 마음이 없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만 있으면, 그것도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러 있어도 다 들을 수 있고,
아무리 시끄러워도 다 들을 수 있고 더 집중하여 듣습니다.
오래전 다방이라는 것이 있을 때 약속장소인 다방에 갔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저는 듣기를 포기하고 그 음악이 끝날 때까지
주위를 둘러보니 저 구석에 여전히 얘기를 나누는 연인들이 보였습니다.
제가 그때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도 대화를 멈추게 할 수 없구나!
입을 다물게 하면 눈으로 얘기할 것이고,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을 것이다.
실제로 두 연인이 찰싹 달라붙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애인이 없던 저에게는 눈꼴사나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거듭 말하지만 마음이 중요하고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이웃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란 물리적, 거리적 이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아파트 문화에서 이웃은 이웃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거의 아무도 이웃을 이웃이라고 생각지 않고
층간 소음 등으로 사생활을 침해하는 존재로만 여깁니다.
무관심과 무관계가 요즘 이웃이기에
관심은 부담이고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침범입니다.
어제는 새벽에 근처를 운동 삼아 걸었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지렁이들이 아스팔트길 가운데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길 가다보면 그렇게 나왔다가 햇빛에 말라 죽은 지렁이를 많이 봐온 터라
지렁이를 일일이 길가 흙 있는 곳으로 옮겨준 다음 운동을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갔다가 다시 오면 또 다른 많은 지렁이가 어느새 나와 있어서
그 지렁이들을 다 옮겨주다 보니 운동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차츰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지렁이는 생명이 아니라 지장이 되고 귀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귀한 생명이 귀찮은 것이고, 지장일 뿐이라니!
이런 저를 보면서 저의 사랑의 정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지는 않지만 고작 나의 운동이 지장을 받음에
생명도 귀찮은 것이 되고 마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레위인과 사제도 사랑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당해 죽어가는 사마리아인이 귀찮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보고도 못 본 체 했고 지나쳐갔던 것입니다.
요즘 유행되는 말 중에 귀차니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귀찮게 여기는 주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사가 귀찮은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귀차니즘이 나로 하여금 사람과 사랑에 무관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라고 비는 주님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