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를 찾지만,
종교 안에서 고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종교도 하나의 인간 집단이다보니
그 안에도 인간 사이의 갈등이 있고,
그로 인한 고통이 또 있음을 봅니다.
그렇기에 실망을 하고 쉽게 다시 종교를 떠나가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을 약속하시는데,
사실 상 우리는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소위 말하는 열심히 살아간다는 이들이
더 크고 더 많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하느님이 계시는 것일까,
하느님의 정의는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 마져도 들곤 합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안타깝게도
고통을 없애 주시는 방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서 그 멍에를 어떻게 하셨는지
보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죽음의 상황에서
성자는 성부께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말씀하시지만,
제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를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되뇌입니다.
그 엄청난 고통의 시간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을 수 이썼던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이룰 때 아버지와 일치할 수 있고,
그 일치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는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함께 아파하신다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비록 고통이 바로 해결되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느님께서 그 고통 한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 받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온유함으로 다가오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