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성인들 중의 사랑의 성인이 사도 요한이고,
성녀들 중에 사랑의 성녀가 막달라 마리아나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라면
성인들 중의 믿음의 성인은 사도 베드로이고,
성녀들 중에 믿음의 성녀는 마르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면 오늘 마르타 성녀가 고백한 신앙은
시몬이 예수께 대해 고백했던 그 신앙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더 발전시킨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고 믿음을 고백한 것 때문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게 되고,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면
마르타 성녀는 페트라라는 이름을 받아 마땅하고
교회의 반석이 되는 성녀로 공경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르타 성녀가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반석 대우를 해달라고 하실 분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에
우리는 오늘 그분의 축일을 맞이하여 성녀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고 배우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마르타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었던 분이고,
그 앎이 믿음으로 발전한 분입니다.
그런데 앎이 믿음으로 발전하는 데는 오빠의 죽음이 중간에 놓여있습니다.
오빠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마르타 성녀에게
아는 것을 넘어서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런 일을 겪고도 너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느냐,
더 나아가서 당신을 믿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비온 뒤에 굳어지는 땅처럼 믿음은 흔들리면서 자라고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 안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수도 있을 때
그 의심을 떨쳐버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고
자기 전부를 거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는 도박하는 사람이 이쪽에 돈을 걸 수도, 저쪽에 돈을 걸 수도 있는데
이쪽이 맞다고 믿고 자기 돈을 전부 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알면 믿을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다 아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분은 참으로 좋은 분이셔서
오빠의 죽음의 의미를 지금은 내가 잘 모르지만
더 좋은 뜻이나 계획이 오빠나 자기에게 있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믿음은 그저 좋으신 분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믿는 것이기에
죽음 뒤에 부활까지 가능케 하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실로 믿음은 자기 돈 전부를 거는 것보다
자기의 삶과 죽음 전부를 걸 때 더 전적이기에 완전하게 됩니다.
마르타에게 있어서 오빠는 자신처럼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오빠의 죽음은 마르타에게 더 크고 완전한 믿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마르타의 믿음을 더 크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라자로가 죽기까지 일부로 가지 않으신 것일 겁니다.
우리도 삶의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에서 빨리 건져주십사고 주님께 청해도 들어주시지 않을 때
마르타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주님의 뜻이 있을 거고 믿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