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성 라우렌시오 축일의 독서와 복음은 씨앗 얘기가 공통입니다.
그런데 서간과 복음에서 이 씨앗의 의미가 조금은 다릅니다.
서간에서 씨앗은 내가 가진 무엇인데 비해
복음에서 씨앗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공통점을 얘기하면
그 씨앗이 무엇이건 사랑으로 뿌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가진 무엇을 씨앗처럼 뿌리라는 얘기를 보겠는데
바오로 사도는 많이 거두려면 씨앗을 많이 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어도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앗을 많이 뿌리지 않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들이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뿌릴 씨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많이 뿌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뿌릴 씨가 많지 않다면 많이 뿌릴 수 없지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나요?
당연히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생각은 다르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나에게 씨앗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도 씨앗이 없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씨앗을 우리에게 안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려는 마음, 곧 사랑만 있으면 뿌릴 씨를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게 없는 것이 씨앗인 것 사실이고, 없어도 되지만
문제는 꼭 있어야 할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열매까지도 몇 갑절 늘려주신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지 돈이 없거나 능력이 없어서
사랑 실천을 못한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씨앗이 되는 것을 보겠습니다.
나 자신을 씨앗으로 내어주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고,
그러니 큰 사랑이 없으면 가진 것은 줘도 자신은 줄 수 없습니다.
제가 딱 이 수준입니다.
저는 무엇을 제 소유로 움켜쥐느라 못 주지는 않는 편이지만
저 자신을 내어주지는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제 목숨을 바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고,
몸이 조금만 아파도 거기에 매달리느라 사랑을 미루고,
좋아하는 것을 사랑 때문에 포기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사랑 때문에 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순교자는
교회의 보물들을 영적 보물들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고,
자신마저 썩어야 할 한 알의 밀알로 내어주었습니다.
그것도 통닭구이처럼 석쇠 위에서 타 죽는 방식으로.
실로 불보다도 더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순교입니다.
이런 성인을 보며 그저 감탄만 하고 있어도 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