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라.”
오늘 감사송은 클라라를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걸은 성녀로 칭송합니다.
“주님께서는 복된 클라라를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써
세라핌 완덕의 정상에 올리셨나이다.”
그리고 클라라의 가난을 얘기할 때 매우 엄격한 가난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사실 클라라는 가난을 가장 엄격하게 산 성인 중의 하나이고
가난 면에서는 어쩌면 가난의 대명사요 클라라가
그의 가난을 따르고자 했던 프란치스코보다도 더 가난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클라라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엄격한 가난만을 살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엄격한 가난이지 지극히 높은 가난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클라라가 가난을 엄격하게 준수하였지만 기쁨이 없었다거나
엄격한 가난을 실천하였지만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산 것이 아니고
그런 가난을 우리는 칭송하지도 따르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클라라의 가난은 우선 관상적 가난이고,
그래서 지극히 높은 가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관상을 위한 가난이지 가난을 위한 가난은 아닙니다.
관상을 위한 가난일 때
우리는 무엇을 소유치 않는 게 아니라 사랑치 않는 것이며
그럴 때 봉헌하는 가난이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난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면 소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애착하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가난은 무엇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유 이상의 애착이나 만족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되게 하고,
아무 것도 소유치 않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애착치 않고 만족치 않으며 무엇에도 안주치 않음으로써
지극히 높은 가난은 훨훨 하느님께로 오르게 하고 하느님께 머물게 합니다.
다음으로 지극히 높은 가난은 형제적 가난입니다.
가난하기만 하고 형제애가 없으면 낮은 가난이고,
가난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면 그 가난은 더 낮은 가난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보면
재산 때문에 형제끼리 싸우고 갈라서기도 하지만
가난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져 싸우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클라라의 공동체를 보면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기에
가난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 덕분에 영혼이 풍요로워져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클라라는 하느님 때문에 가난한 자매들을 가난 때문에 더욱 사랑하고,
특히 가난 때문에 병약한 자매들을 더욱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이것은 마치 콩 한쪽도 반으로 나눠먹는 사랑이고 그래서 애틋합니다,
저는 요즘 같은 더위에 클라라 공동체를 생각해봅니다.
좁은 공간, 에어 콘은커녕 선풍기조차 없는 수도원에 자매들은 많아서
마치 좁은 감방에 열기 때문에 옆 사람이 원수가 되는 그런 일이
클라라의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라라와 공동체 자매들은 그러지 않았지요.
그것은 클라라와 자매들이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기 때문이고
이것이 바로 관상적이고 형제적인 가난을 살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오늘, 에어 콘이 없어서 더위에 짜증이 나고 옆 사람이 없었으면 할 때에도
더위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하며 더위도 관상하고 하느님도 관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