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와
기도와 축복을 해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하자 그들을 나무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그런 나무람에 대해서 언짢아하셨다고
마르코복음은 얘기하는데 제자들이 조금은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이거 다 스승을 위해서 그런 것인데 언짢아하시니 말입니다.
수많은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시달리시고,
짬짬이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주시느라 힘드신데
애들까지 데려와 기도해달라고, 축복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염치도 없고, 이기주의적이라고 생각하여 나무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의 행위를 주님께서 언짢아하신 것인데
주님께서는 왜 언짢아하신 걸까요?
제 생각에 아마도 제자들이 힘 있는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와
기도와 축복을 청하였다면 나무라지 않고 주님께 인도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힘없는 아이와 힘없는 사람들이 그리 절박하지도 않은데
기도와 축복을 청하니 나무라고 밀어낸 것일 겁니다.
저도 그렇고 수도자 사제들이 솔직히 이런 잘못을 많이 저지르잖습니까?
그래서 저의 고백성사꺼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죄의 고백입니다.
이 점을 의식하며 ‘나는 힘없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더 잘 들어줄 거야’라고
제가 다짐하고 노력하지만 이렇게 의식하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해야지만 겨우 힘없는 사람을 제가 내치지 않는 수준이라는 표시죠.
그렇지 않습니까?
의식치 않아도 잘 해 주는 것과 의식해야만 해주는 것은 큰 차이가 있고
거기다 다짐과 노력까지 해야만 잘 해주는 저라면 저의 속 됨됨이가
주님의 가르침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수준인 것이지요.
제자들도 저와 별 차이가 없어서 그 수준이 들통이 난 것인데
주님은 속속들이 힘없는 사람 우선이어서 즉시 그들을 데려오라 하시고,
기꺼이 기도도 해주시고 축복도 해주십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는 세속적인 우리의 생각과 처신과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는 힘없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
그들이 더 사랑을 받는 나라입니다.
저는 이것을 알기에 지난 포르치운쿨라 행진 때
제일 힘들어하는 분들과 약자들을 기준으로 행진을 하였습니다.
곧, 그날의 제일 힘들어하는 분을 앞에 세우고 걷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체 행진이 늦어지고 걷는 시간은 길어지겠지요.
행진 시간이 길어지면 땡볕에 더 힘들어지겠지요.
그러면 잘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빨리 걷고 빨리 쉬자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올해 행진자들은 저의 이런 방침을 정말 잘 이해하여
같이 고통을 당하고, 같이 끝까지 행진을 해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는 힘 있는 사람 위주의 나라가 아니고
하느님이 주인이 되셔서 힘없는 사람도 존중을 받는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만이라도 힘없는 사람들이 와서 깃들 수 있기를,
그리고 저만이라도 힘없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