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계속되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일 수도 있고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우리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비유에서 <아무나> 불러오라는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이 표현에 제 기분이 살짝 나쁘기 때문이고, 그리고
기분 나쁜 이유는 제가 그 <아무나>에 해당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고위 공무원이 섬겨야 할 국민을 개돼지에 비유한 것처럼
저나 여러분이 하느님 나라와 교회에서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란 말입니까?
그렇게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같은 내용의 루카복음에서는 <아무나>란 표현이 없고,
악인과 선인 얘기 대신 가난한 사람 병자 할 것 없이 초대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오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귀하게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그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초대를 개떡같이 여기기에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아무나’에 해당되는 이방인들이 초대받는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나>의 의미를 올바로 정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모두>의 뜻으로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도 초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선인 악인 가리지 말고 모두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태오복음은 아무나 데려오라고 주인이 말하자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데려왔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무나>는 선인은 물론 악인까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태오복음의 하느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 부분에서도 루카복음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심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선인과 악인이 모두 초대된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가 완전한 자, 선인들만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기를 바라기 때문에 실망의 덫에 걸려 교회를 떠나거나
떠나지 않더라도 대단히 분노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교회와 수도공동체는
우리 편에서 보면 완전한 자, 선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죄인들의 공동체이고,
그러기에 하느님 편에서 보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나 죄인이기에 부르심 받았으니까 죄인인 채로 살 거야’
뭐 이런 식으로 얼굴에 철판 깔고 가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루카복음은 이렇게 덧붙이지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러므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우리가 꼭 의인일 필요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은 회개의 정신과 회개의 의지와 회개의 마음이고,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혼인잔치의 예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화답송이 얘기하듯
부서진 우리의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주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실 거라고 겸손한 믿음을 자기고,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꿔주시길 바라며,
정결한 물을 뿌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시길 바라며
우리는 주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