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지 질문을 받으십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구원 받으셨습니까?’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
일부 무례한 개신교 신자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와 같은 사람과 비교하면 구원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 문제에 관심이 많아야 하고
그래야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행복의 문제에는 관심이 많아도
구원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신앙인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인임에도 구원의 문제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구원을 내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 때문이거나
행복과 구원을 별개의 문제로 보고
지금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라면
현세의 행복이든 내세의 구원이든
다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앞서 제가 예로 든 개신교 신자들이
비록 무례하기는 하지만 하느님께 구원을 두고 있기에
대다수 우리 천주교 신자들보다 훨씬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께 구원을 두고 있음은 맞지만
미성숙하고 광신적인 구원론에 그들은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바는 하지 않고
그저 ‘주님, 주님!’하면서 하느님만 믿으면 구원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문제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성당 문이 곧 천당 문이요 구원의 문이 아니다.
성당 문을 부지런히 드나든다고 천당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시편은 정의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합니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내가 들어가 야훼께 감사기도 드리리라.
이것이 야훼의 문,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라.”(시편 118, 19-20)
복음은 불의를 저지르면 구원의 문이 닫힌다고 합니다.
성당에 와서는 ‘주님, 주님!’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체 하지만
성당 문을 나서면 주님의 뜻을 개떡같이 여기며 깔아뭉개는 자에게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며
다른 사람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문 밖에 있을 거라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명문 대학처럼 소수만 그리로 들어오도록
하느님께서 애초부터 그 문을 좁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로 들어오기를 바라시지만
그리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좁은 문인 겁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만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기에
당신의 다른 자녀에게 우리가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
하느님께서 가만히 있으실 수가 없습니다.
정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최소한의 사랑이요 기본이고,
사랑이 가장 완전한 정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정의와 자비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아무튼 성당 문이 곧 천당 문, 구원의 문은 아닙니다.
성당 문이 정의의 문, 사랑의 문, 자비의 문이 될 때 곧 천당 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해인 올해 자비의 성당 문을 활짝 열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