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율법 교사들에 대한 나무람을 계속하시는데
그들이 자기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지만
조상들이 죽인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다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로 치면 우리가 우리 성인들의 무덤을 방치하는 것이 좋을까?
요즘 우리 성지들을 다들 아름답게 꾸미는데 그것이 나쁘다는 뜻인가?
사실 제가 그런 느낌이나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일부 성지들은 너무 성지를 잘 꾸며놓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옛날의 소박함을 잃고 너무 화려하고 과시적이라는 느낌 때문입니다.
아무튼 율법 학자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잘 꾸며 놓았는데
왜 조상들이 저지른 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가
같은 내용의 마태오복음과 비교해보니 그 뜻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민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며놓았으면
조상들과 달리 예언자들의 말을 잘 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조상들이 한 짓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성인들의 무덤과 성지를 잘 꾸며놓고는
성인들의 삶은 하나도 따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성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은 조상들과 똑같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죄를 지었으면 자기 피에 대한 책임만 져야지
왜 조상들의 피의 책임까지 다 져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걸까요?
억울한 덤터기가 아닌가요?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조상들을 반면교사 삼아 배우지 못한 책임이고,
예언자들이 피 흘리며 가르쳐 줬음에도 그대로 살지 않고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것에 대한 책임입니다.
우리로 치면 첫째로 오늘날의 예언자들을 몰라보는 것이며
심지어는 예언자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쓴 소리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권력자들이 아니기에 우리가 직접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말을 싫어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예언자들을 죽이는 방식입니다.
다음으로는 예언자들이 피를 흘리면서까지 증거 한 것을
우리가 헛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자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었으니
예언자임을 몰라보는 것도 예언자를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증거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피의 증거를 헛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삼척에 와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핵발전소 반대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격려하러 왔는데
이들이 그렇게 고생하며 예언을 하는 것을 우리가 귀담아 듣지 않아
경주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이곳에 지진이 일어났을 경우
우리나라도 일본의 후쿠시마처럼 큰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후쿠시마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깨우치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전과 똑같이 살 때
하느님께서는 후쿠시마의 피의 책임까지 우리에게 물으실 거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강력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