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 들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이 안 먹으니까 안 먹는다고,
예수님께서 잘 드시니까 잘 드신다고 타박입니다.
그러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런 사람의 장단에는 누구도 춤을 출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반대할 것이고, 비판할 것이며, 비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뭣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무리 하찮은 사람,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좋은 면이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선을 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볼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위대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게서 선을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선은 볼 수 없고,
악만 볼 수밖에 없는 불능은 어떤 불능인 것입니까?
그러면 자기만 손해고 아무런 득이 없는데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남에게서 악만 보는 것이 잘못된 판단이고
내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고 손해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그 부정적인 시각을 바꾸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면 불능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이나 판단을 마비시키고,
부정적인 시각을 바꾸려는 의지적 노력조차 무력화시키는
나의 내적인 기제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악감정입니다.
감정이란 덕이라는 제동장치가 없으면 치닫는 속성이 있는데
특히 악감정이 더 치닫고 시간이 갈수록 더 굳어지곤 하지요.
그렇습니다.
감정이란 이성으로 잘 통제되지 않고,
저같이 감정형의 사람은 더더욱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감정, 특히 악감정을 통제하는 덕은 어떤 덕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여러 덕 중에서 특히 겸손이라는 덕입니다.
겸손이라는 덕은 모든 악감정을 뿌리서부터 열매까지 통제하고
반대로 교만이라는 악덕은 모든 악감정의 뿌리이고 조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감정이 남의 악이나 잘못 때문에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교만이라는 악덕에서부터 원초적으로 생겨나는 것이고,
밖에서부터 생겨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 밖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최고 또는 최상만을 욕심 부리게 하고 고집하게 하는 교만이
그렇지 못한 자신을 먼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미워하게 하는데
이렇게 자신을 못마땅해 하고 미워하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못마땅한 자신을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해 남의 악이나 잘못을 들추며
나에게로 향하는 미움의 화살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최고를 고집하는 사람은 웬만한 선은 선이 아니고 악이며
자기가 최고이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다 깎아 내릴 수밖에 없겠지요.
결국 이런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이 다 안 좋은 사람들이고,
안 좋은 사람 때문에 불만이고 안 좋은 사람과 사느라 괴롭습니다.
이는 마치 좋은 것을 쓰레기로 만든 다음
쓰레기 가운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바로 주위 사람들을 쓰레기로 만들고
쓰레기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