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삼왕의 경배(1890)
작가: 가에타노 프레비아티 (Previati Gaetano, 1852-1920)
크기: 캠퍼스 유채 : 98×198cm
소재지: 이태리 밀라노 브레라(Brera) 미술관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태리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이후 유럽 미술을 석권하던 그들의 전통적인 조형의식이 예술을 퇴보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태리는 르네상스의 진원지이면서 교황이 있던 곳이라, 모든 예술의 중심축은 이태리라는 생각이 확고하던 처지에서 이런 생각이 나오게 된 것은 정치적 변화에 따른 결론이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태리가 지역적인 차원에서는 통일이 되면서도 실재적으로는 통일 이전에 상상도 못했던 여러 문제점과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 중에서 초라한 처지로 몰락한 현실이 드러나던 시대였다.
이태리인들 전체가 인정하기 어려운 북쪽 사보아 왕가가 집권하면서 여러 갈등 요인들이 폭발하면서 이태리인들은 유럽 문화의 진원지라는 자부심이 삼류국가라는 국민적 자조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시대 경향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새롭게 나아가자는 뜻에서 시작된 미래주의가 작가가 활동하던 밀라노 지역에 퍼지면서 작가 역시 이런 시대 풍조를 바탕으로 르네상스가 이룬 전통적인 기법에서 과감히 탈피해서 신인상파적인 사고와 상징주의적 표현까지 도입해서 새로운 화풍을 창출했다.
삼왕의 경배 내용은 예수 성탄의 기쁨을 가장 풍요롭게 전하는 마태오 복음 2장에 나타나는 내용이며 루카 복음 2장에 나타나고 있는 목동들의 경배와 함께 성탄의 이미지를 가장 감동적으로 각인시키는 내용이다.
등장인물 역시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 등 여느 성화의 등장인물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전통적인 기법에서는 말구유라는 장소 선정으로 제한성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선 평면으로 배치하면서 태어나실 아기는 만왕의 왕이심을 장소적 개방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징적 표현을 도입한 작품에서 멀리 보이는 곳에 삼왕들이 타고 온 낙타의 모습들이 희마하게 드러나면서 이들이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 치루어야 했던 긴 여정을 암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표현에서 삼왕은 인종적으로 다양함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색깔로 표현했으나 여기에서 나이의 구분 외에 구도자의 모습이 유일한 동일성이다. 초록색 옷을 입은 박사와 중간에 있는 젊은이를 제외하고는 인생을 충분히 산 것으로 보이는 노인이 사색의 표정으로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깊은 경배와 감사의 표정으로 있다.
성모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전통적인 표현에 자주 드러나는 하느님의 아들의 상징인 후광이나 그의 사명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표식이 전혀 없는 여느 건강한 사내 아기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아기가 보이고 있는 모든 것을 맡기고 평안히 잠든 아이의 모습이다. 더 할 수 없이 평안한 건강한 인간 아기의 모습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인생의 지혜에 있어 탁월한 경륜이 있는 세 명의 박사는 이 평범한 아기 안에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 없는 감동과 평화의 모습으로 몰입된 상태에 있다.
크리스천 신앙의 발견은 요란스러운 기적이나 흥미위주의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진리 역시 일상 삶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이 작품은 암시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 성모님의 잉태는 인간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작용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성모님은 성령의 후광과는 무관한 아들을 순산한 여느 어머니의 모습이다.
너무도 평범한 이 출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찾아온 삼왕들을 영접하면서 성모님은 결코 당황하거나 어색한 표정이 없이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삼왕의 경배를 받고 있다.
오른손으로 잠자는 아기 예수를 붙들고 있는 성모님은 왼손으로 삼왕들에게 인사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기법에서는 어떤 모습으로든지 아기 예수가 관람객이나 삼왕을 축복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성모님이 이 역할로 삼왕들에게 인간적 감사의 표현과 함께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대신 전하고 있다.
가장 늙은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삼왕은 긴 옷을 입고 있고, 이 옷의 끝부분을 시종이 들고 있다. 항상 삼왕의 경배에서는 예물을 들고 온 시종들도 등장하는데, 이기 시종들은 하나같이 젊은이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삼왕을 시중들면서 삼왕이 아기 예수에게 바칠 예물을 들고 서 있다.
이 시종들은 삼왕에 대한 신뢰 하나로 먼 여행길에 올랐고, 구세주를 만나 경배하고 있는 삼왕을 지켜보면서 자기들의 사명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하며 기뻐하고 있다. 삼왕은 구세주와 너무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시종들 사이에 영적인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삼왕의 신분이 무엇이었는 성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신분이 되면서 더 이상 아쉬움이 없는 기득권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안정된 삶에 만족치 않고 가치 있는 삶에의 갈망을 키웠기에 멀리 보이는 낙타를 타고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구세주를 찾아 왔다.
교회는 이것을 진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너무도 쉽게 말하나, 이것 보다 더 깊으면서 평범한 뜻은 예수를 만나고 그의 뜻을 따라 제자로서의 삶이 가장 인간으로서 오신 예수의 모습을 보이는 삶임을 전하고 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는 삼왕과 시종들의 모습은 언젠가 변함없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성탄 전야는 성탄의 기쁨이 최고로 표현되는 시간이고 모든 것이 예수의 탄생을 중심으로 엮어지게 된다.
헌데 우리 사회는 오늘도 촛불 시위라는 것을 통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뜻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종교적 표현을 떠나 예수의 가르침인 평화와 정의를 전하기 위해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이 모임은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아기 예수가 성전에 봉헌될 때 예언자 시메온이 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도 될 것이나, 이 모임을 통해 예수의 뜻이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오늘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성탄 축제의 새로운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우리 국민은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줄기를 중심으로 모인 더 할 수 없이 저질스럽고 악질적인 인간 집단을 보면서 심한 분노와 자조감을 느끼고 있다.
어느 민족들에게나 다 있을 수 있는 결점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더 놀랍고 부끄러운 것은 이 악한 집단들 안에 여러 크리스천들이 악을 떠바치는 단단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황당스러운 현실에서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은 크다. 많은 선의의 인간들이 촛불 집회를 통해 추한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삼왕처럼 진리에의 갈망이나 확신 때문에 이 부끄러운 사회 풍조에 물들지 않고 삼왕처럼 의연한 자세로 크리스천 삶을 여정을 걸을 때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밝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