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제자가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순종이 완벽한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참되게 순종하는 사람을
시체에 비유하여 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 시체를 놓아 보십시오.
움직이게 해도 저항하지 않고,
그 위치에 대해 투덜거리지도 않으며,
다시 자리를 옮겨도 울부짖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좌에 앉히면 올려다보지를 않고 내려다봅니다.
자주 빛 옷을 입히면 두 배 정도 더 창백해 보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참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동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어디에 놓이든 관심이 없으며,
다른 곳으로 바꿔 달라고 고집스럽게 말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올라가도 자기의 습관된 겸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공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더욱 하찮게 여깁니다.”
제가 관구장일 때 수사님 중의 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유언을 하셨습니다.
나환자들을 위해 사신 분이시기에
다른 나환자들처럼 화장을 해달라고 하셨고
나환자들 가운데 묻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실 때 저는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형제들과 의논을 하니
화장을 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다른 곳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지만
수사님을 저희 수사님들이 묻힌 곳에 함께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수사님은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느냐고 불평치 않으시고
저희가 모신대로 지금까지 그대로 계십니다.
시체는 이러한 것입니다.
묘지에 모시기 전, 수사님 유언대로 화장을 하였습니다.
화장장에서 일하신 분들이
제가 원하면 화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로 뒤로 가서 수사님 육신이 타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몇 백도의 불이 육체를 타들어가도 피하지 않고
파괴자가 아니라 형제인 양 그 불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완전한 수동태인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 야훼의 종이 되어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기리는 수난주일입니다.
수난이라 함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거역하지도 않으시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십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셨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시고 부끄럽지 않으십니다.
모욕을 주어도 모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매질 당하고,
수염 뜯기고,
뺨을 맞아도
마음은 꿈쩍 않으시고
깊은 물처럼 고요합니다.
작은 접시의 물은 조약돌 하나로도 온통 출렁거리지만
깊고 큰 호수의 물은 큰 돌이 굴러 떨어져도
한 번 풍덩하고 잠잠해지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수난의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주님은 호수같이 큰 수난의 그릇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작은 모욕으로도 존재가 흔들리고
작은 상처로도 그렇게 아파하는데
주님은 어떤 모욕도 모욕이 되지 못하고
아무리 작정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모욕은 받는 사람이 당하는 것이지
아무리 주어도 받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받고
좋아하고 환영하는 사람은 받지 않습니다.
좋아하고 환영하면 모욕이 아예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거부하면 할수록 모욕은 커지고
오히려 들러붙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처럼 싫고 좋음이 없이
무엇이든 다 좋은,
수난의 큰 그릇들이 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떤 순종이 완벽한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참되게 순종하는 사람을
시체에 비유하여 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 시체를 놓아 보십시오.
움직이게 해도 저항하지 않고,
그 위치에 대해 투덜거리지도 않으며,
다시 자리를 옮겨도 울부짖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좌에 앉히면 올려다보지를 않고 내려다봅니다.
자주 빛 옷을 입히면 두 배 정도 더 창백해 보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참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동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어디에 놓이든 관심이 없으며,
다른 곳으로 바꿔 달라고 고집스럽게 말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올라가도 자기의 습관된 겸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공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더욱 하찮게 여깁니다.”
제가 관구장일 때 수사님 중의 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유언을 하셨습니다.
나환자들을 위해 사신 분이시기에
다른 나환자들처럼 화장을 해달라고 하셨고
나환자들 가운데 묻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실 때 저는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형제들과 의논을 하니
화장을 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다른 곳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지만
수사님을 저희 수사님들이 묻힌 곳에 함께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수사님은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느냐고 불평치 않으시고
저희가 모신대로 지금까지 그대로 계십니다.
시체는 이러한 것입니다.
묘지에 모시기 전, 수사님 유언대로 화장을 하였습니다.
화장장에서 일하신 분들이
제가 원하면 화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로 뒤로 가서 수사님 육신이 타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몇 백도의 불이 육체를 타들어가도 피하지 않고
파괴자가 아니라 형제인 양 그 불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완전한 수동태인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 야훼의 종이 되어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기리는 수난주일입니다.
수난이라 함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거역하지도 않으시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십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셨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시고 부끄럽지 않으십니다.
모욕을 주어도 모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매질 당하고,
수염 뜯기고,
뺨을 맞아도
마음은 꿈쩍 않으시고
깊은 물처럼 고요합니다.
작은 접시의 물은 조약돌 하나로도 온통 출렁거리지만
깊고 큰 호수의 물은 큰 돌이 굴러 떨어져도
한 번 풍덩하고 잠잠해지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수난의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주님은 호수같이 큰 수난의 그릇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작은 모욕으로도 존재가 흔들리고
작은 상처로도 그렇게 아파하는데
주님은 어떤 모욕도 모욕이 되지 못하고
아무리 작정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모욕은 받는 사람이 당하는 것이지
아무리 주어도 받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받고
좋아하고 환영하는 사람은 받지 않습니다.
좋아하고 환영하면 모욕이 아예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거부하면 할수록 모욕은 커지고
오히려 들러붙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처럼 싫고 좋음이 없이
무엇이든 다 좋은,
수난의 큰 그릇들이 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님께 순종하여 노란 봄도 찿아왔고.........
주신 말씀 고이 간직합니다.
오늘 말씀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