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심오한 말씀입니다.
사랑과 생명, 미움과 죽음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 중국에 가서 강의할 때도 한 얘기지만
제가 많은 방황과 편력을 하다가 그리스도교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이
우리가 요즘 매일 읽는 요한의 서간이고,
요한의 서간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언표 안에서 저는 천지창조와 세상구원과
삶의 이치 등 인생의 모든 난제들과 궁금증들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모든 것의 근원이며 이치입니다.
그리고 진정 사랑이 생명입니다.
사랑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고,
사랑 안에 진정 생명이 있으며,
사랑으로부터 생기와 활기를 얻고,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얘깁니다.
목각인형을 만들거나 도자기 하나를 만들어도 사랑으로 만들 듯이
우리의 생명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빚은 것이잖아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온 것이고요.
우리도 미워하는 것을 만들지 않고
미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창조 의지가 없으며,
미우면 이미 있는 것도 없애버리고 싶어 하고,
없애버리고 싶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미움이 있으면
뭘 만들거나 창조하려는 창조의지나 창조 에너지는 없고
오직 미워하는 그것을 어떻게 없애고 망가뜨릴까만 생각하는
파괴의지와 파괴 에너지만 있게 됩니다.
어제는 아침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면서
<소유>와 <사랑>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저를 성찰케 되었습니다.
제 뒤에 있는 형제들이 제 뒤통수에 내내 매달려 있는 거였습니다.
그 형제들이 제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것이 아니라
제가 그 형제들을 내내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왜?
이렇게 기도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형제들에 대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신경을 내내 쓴 것이이지요.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으면서 하느님 말씀에 잠기다가도 뒤를 의식하는,
그런 저를 보면서 하느님께 바라지 않고 형제들에게 바라는 저를 봤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지요.
시편에 “내 영혼아, 하느님께 바라라,”(42,12)는 노래가 있지요.
그런데 저는 하느님께 바라지 않고 형제들에게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큰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걸 바라면서 형제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들여다보니 제가 좋은 형제들이기를 바라는 이유가
형제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에는 사랑의 바람과 욕심의 바람 두 가지가 있는데
저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바랐던 것입니다.
어떤 때 길을 가다가 갖은 치장을 한 개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누구를 위한 것일까? 개를 위한 치장일까 주인의 만족을 위한 치장일까?
형제들이 열심히 기도하기를 제가 바라는 것도
형제들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일까?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면 사랑이고
미움이나 분노가 생기거나 꼴 보기 싫어하면 욕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