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공현 축일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셨음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그런데 공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별이 주님께로 인도하는 측면이 있고,
사람이 주님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지요.
별이 주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은 사람의 역할이나 도움 없이도
하느님께서는 별을 통해서라도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인데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교리와 맥락이 같은 거지요.
실로 우리는 바람과 하늘거리는 나뭇잎을 보면서 하느님을 보고,
장엄하게 뜨는 해를 보면서 하느님을 보기도 하지요.
그러니 별을 통해서도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여기에는
어둠을 통해서도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둔 밤을 지나는 사람은 어둡기에 빛을 찾고,
빛을 찾다보니 별을 길잡이 삼게 되는 것이지요.
빛이신 하느님을 찾은 사람은 하나같이 짙은 어둠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너무 고통스럽고 죽을 지경인데 주변에 구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사람으로 인한 희망이 하나도 없을 때 빛을 하느님에게서 찾는 법이지요.
저만해도 태중 교유이기에 일찍부터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하느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3년의 절망을 거치고 나서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공현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사람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별이 삼왕을 인도해왔지만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독점치 않고
보여주었기 때문에 공현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만일 두 분이 주님의 공현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헤로데와 같은 자가 주님의 공현을 막으려고 했는데
하마터면 이 자 때문에 주님 공현이 막힐뻔 하였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 중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주님의 공현을 막는 자와 주님을 공현케 하는 자입니다.
심지어 신자인 우리 중에도 주님 공현을 막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아기 예수를 보여주지 않고 사유화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는 헤로데처럼 주님의 공현을 막아야겠다고
대놓고 나서지 않지만 주님의 공현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불식간에 주님의 공현을 내가 가로막는 것인데
자기만 주님을 보면 된다고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나의 구원만을 위해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앞의 하느님만 보지 옆의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다.
내 옆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많은데도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데도
그들의 구원과 행복은 신경 쓸 수 없습니다.
마리아로 치면 예수님을 낳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자기만 보고 행복해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를 낳아주지 않고 자기 태 안에 가두는 것이지요.
실로 요즘 이런 신앙이기주의를 봅니다.
좋은 강의 들으러 많이 가고 찾아 갑니다.
유명하다는 영성 프로그램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갈수록 자원봉사자는 줄고 늙은 사람들만 봉사합니다.
이는 마치 동방박사들처럼 먼 길을 주님을 찾아가서 뵙지만
자기만 보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굳이 이해하자면 아직 사랑이 부족하고 행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착하고 거룩한 행실로
마리아처럼 예수를 사람들에게 낳아주자고 합니다.
사랑의 실천만이 사랑이신 주님을 낳아주고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지요.
실천적 주님 공현의 삶을 살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