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어제 세례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을 소개하는데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일 뿐 아니라
더러운 영조차 말씀을 따르게 하는 힘이었음을 얘기합니다.
먼저 주님의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권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정 권위가 있는 분이지 권위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권위 있는 사람과 권위주의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제 생각에 권위주의자는 권위를 무척 의식하고
상대로 하여금 자기 권위를 느끼게 하는데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권위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권위를 의식치 않고
권위 있음을 상대가 먼저 알고 인정하기에 권위를 부리지 않습니다.
권위주의자는 도덕적 권위가 없기에 권력을 가지고 위세를 부리고
권력도 정당하고 공정하게 행사치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행사합니다.
그러나 진정 권위가 있는 사람은 권위의 바탕이 정의와 공정이기에
불의하고 불공정하지 않음은 물론 아예 권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권위주의자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고 특히 겸손과 사랑이 부족하기에
남을 존중할 줄 모르고 힘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복종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인격적 권위가 있는 사람은 겸손과 사랑에 바탕을 두기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특히 각 사람의 권리를 존중합니다.
권위주의자는 자기권위가 없기에 다른 권위에 의존합니다.
성직자들은 교황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학자들은 유명한 학자들의 주장에 의존하기에 여기서부터
성직주의, 학벌주의, 관료주의 같은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진정 권위가 있는 사람은 그 권위가
그 사람의 도덕적인 정당함과 인격적인 성숙함에서부터 나오기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 다른 사람들이 그 권위를 알아보고 인정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표하며 권위에 따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권위를 넘어서는 것이며 영적인 권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도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고매하고 거룩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 모셨기 때문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세례를 받으실 때,
곧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물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실 때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신 것이고 그래서 이후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성령에 따른 것이기에 영적인 권위가 있었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더러운 영조차 따를 수밖에 없는 권위였지요.
그런데 이런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로 부르신다고
오늘 히브리서는 얘기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형제라면
형제를 무시하고 내리누르는 권위주의자가 아니라
형제를 형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영적 권위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