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히브리서 말씀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다시 반문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여, 아버지의 훈육을 아들이 받는 것을 당연한 듯 얘기하는데
훈육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실제로 얼마나 됩니까?’
실로 우리는 아버지의 훈육을 책망으로만 여기고
시련을 벌로만 여길 뿐 훈육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는 별로 책망을 많이 받지 않았고
시련을 많이 받지도 않았지만 시련을 벌로 생각한 적인 별로 없습니다.
반대로 양성책임자나 원장이나 관구장의 직무를 오래 수행했기에
저는 충고나 책망을 오히려 많이 한 편이지요.
그래서일까, 훈육을 훈육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고를 충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때
왜 그렇게밖에 못할까 많이 안타까워했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더 문제는, 아니 더 근본적인 문제는
훈육을 책망으로 여기고, 시련을 벌로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이건 훈육이건 시련이건 벌이건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 미움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의심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몰라도 어찌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의심할까요?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면 악마이고 하느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 말씀하시듯 인간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을 알거늘
어찌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쁘고 해로운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이치적으로(이성적으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경험의 왜곡 때문입니다.
경험의 왜곡?
예, 경험의 왜곡 때문입니다.
우리 또는 우리의 아버지가 정말 독선적으로 책망하거나
홧김에 할 말 못할 말을 퍼붓거나 한 경험이 있었다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사랑으로 했지만
그 사랑에 약간의 분노가 불순물처럼 있었다면
이 경험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도 그럴 거라고 오해를 한다지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하느님도 무서운 분,
벌주시는 분으로만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느님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왜곡하게 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매개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매개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매개자입니까, 왜곡자입니까?
이걸 깊이 묵상하고 성찰하는 오늘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