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축복의 현대적인 해석.
저는 오늘 창세기 묵상을 이 주제로 잡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회 전례는 창세기 1장을 둘로 나눠 어제는
창조의 전반부 4일째까지를 듣고 오늘은 나머지를 듣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눔은 분량을 보고 적당히 나눈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지 못하는 창조와 축복을 받는 창조로 나눈 거지요.
어제는 창조하신 다음 어떤 것도 축복해주지 않으셨는데
오늘은 창조하신 것들, 곧 동물과 사람에게 축복을 해주시고
일곱째 날, 안식일까지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해주십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요.
왜 식물과 무생물에게는 축복을 해주지 않으시고
동물과 인간에게는 축복을 해주시는 것일까?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을 하느님께서 차별하시는 걸까요?
차별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생물과 식물은 복을 받는 존재,
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을 보면 번식과 번성인 것을 보면
무생물과 식물은 번식과 번성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겼기에
축복을 하느님께서 해주지 않으신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수도자들이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축복을 거부하는 존재고,
결혼을 했어도 번식과 번성을 못하는 사람은 구약에서 그리 취급했듯이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얘기가 되는 겁니까?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고
그러므로 하느님 축복에 대한 해석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선 번식과 번성이 자기 후손이나 퍼트리는
그런 의미의 번식과 번성은 아니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어떤 번식과 어떤 번성이어야 하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생명의 번성이고 사랑의 번성입니다.
생명에 이바지하는 번성이고 그러기에 사랑의 번성이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사랑이 없이 그저 욕망 때문에 애는 낳아놓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번식하고 번성하는 것이겠습니까?
반대로 자기의 애는 낳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고 보호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를 봅니다.
저는 애도 안 낳고 생명에 이바지도 별로 하지 않으며
그저 애 없이 사는 것이 편한 것 때문에 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닌지?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려는 뜨거운 사랑도 열정도 없이
사랑하는 시늉이나 조금 하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아닌지?
더 근본적으로 나는 하느님의 축복을 원하는 사람인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존재인지 거부하는 존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