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먹는 날,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창세기는 뱀을 간교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물을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만드시고 난 뒤에는 뱀에게도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을 것이니 하느님이 더 간교하신 것 아닐까요?
제가 수십 번 얘기했듯이 인간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 모든 죄의 원죄입니다.
말하자면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러토록 만드셨으니 말입니다.
뱀을 그렇게 만드신 것은 물론이고,
생명의 나무와 함께 선악과의 나무를 만드신 것이나
탐 날 정도로 좋게 만드신 것이 다 하느님 탓이지요.
생명의 나무만 만드셨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거고,
좋은 것으로 만드셨어도 좋은 것만 알게 하시면 좋았을 텐데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시고 악도 알게 만드셨는지....
이것이 하느님 탓이라면 다음은 인간의 탓입니다.
좋게 만드신 것이 왜 문제이고,
좋은 것을 주신 것이 왜 문제입니까?
좋은 것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문제이고
주시는 대로 받지 않고 소유하려는 것이 문제이며
주심에 감사하지 않고 욕심을 내는 것이 문제지요.
프란치스코는 권고 2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의지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자기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결국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그에게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다가
결국 선이 악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그래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 깨끗한데
사람의 배속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똥이 되어 나온다는 주님 말씀처럼
하느님이 주시는 것은 다 선이지만 탐욕의 배로 들어가면 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감성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좋은 것을 엄청 좋아하는 시대이고,
‘좋고-싫고’가 행위의 기준이요, 중심인 시대라는 뜻입니다.
전근대는 의지의 시대이기에 하느님의 뜻이면 싫어도 하고,
공동체와 어른의 뜻이면 좋아도 자기의지를 꺾었으며,
근대는 이성의 시대, 곧 합리성이 중요한 시기이기에
진리에 맞으면 싫어도 하고, 어긋나면 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무리 하느님 뜻이어도 내가 싫으면 안 하고
아무리 합리적인 것이어도 내가 싫으면 하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볼 때 이 ‘좋고-싫음’이 있음이
바로 죄이고 프란치스칸 원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 첫마디에서 이렇게 자신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창세기에 연결시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너무도 싫고 쓴맛이어서
그래서 나병환자를 만나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는데
이것이 죄 중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좋으면 소유하고 싫으면 버리고,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이 자기중심성을 우리는 늘 경계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 탈근대 시대에는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