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오르낭의 매장 (1849)
작 가 : 구스타프 쿠르베 (Gustav Curbet : 1819 - 1877)
크 기 : 캠퍼스 유채 315 X 668 cm
소재지 :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예술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며 19세기에는 미술 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 여러 분야에 있어 낭만주의가 대단한 매력으로 등장하던 시대였다.
이 낭만주의는 이성의 규칙과 속박에서 벗어나 생생한 삶의 직관을 중요시하면서 평범한 일상 삶의 모습을 주제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감성적 분위기를 강화시켰는데 이는 19세기 미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작가의 감정을 중요시하면서 주관적 의지와 상상력에 비중을 둔 예술 활동을 말하며 한 시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운동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여기에 반대하는 사실주의가 일어나게 된다. 낭만주의가 인간의 감성을 중요시하다보니 현실을 이상화나 신비화하거나, 결론으로 도덕적 교훈부터 찾는 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며 철저히 이상을 거부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운동이 바로 사실주의였다.
“사실주의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오로지 이상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라는 역설적인 표현처럼 현실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작품의 작가는 스위스의 오르낭이라는 고장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이런 사람들이 으레 선택하는 안정된 삶의 기반이 보장되는 법률가로서의 길을 가다가 쾌도를 바꾸어 작가의 길을 선택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 몰두했다.
그에게 화가란 정직하게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그리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위해 어떤 몰이해나 반대를 받게 되더라도 예언자적인 자세로 이것을 감내하고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필생을 두고 추구했던 예술적 가치는 사실성(Reality)이었다. 그는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나 상상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을 자기 예술의 목표로 삼았으며 이런 사실주의적인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는 여기에 조금도 개념치 않고 자기의 길을 걸었다.
그는 어떤 이상이나 상상적인 표현도 강하게 부정했으며, 유구한 인간 역사에서 항상 이상의 모델과 같은 천사의 존재 역시 작가에게는 무의미 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리겠다.” 고 할 만큼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현실만을 작품의 유일한 주제로 여겼다.
이 작품의 배경은 작가의 외조부가 고향에서 죽어 장례식을 하는 것이다. 외조부는 동네에서 재력과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었기에 동네 장례식 치고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그런 장례식이었다.
자연히 동네 사람들이 참석한 것이며, 작가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실재 인물과 대조하여 그렸다.
과거 장례를 주제로 하는 작품은 자연스럽게 종교성이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애도의 표현과 함께 착한 영혼이 하느님 곁으로 간다는 신앙적 차원이 등장했으나, 여기서는 전혀 다르다.
먼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임에도 사람들의 표정에서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애도는 찾아 볼 수 없다. 검은 상복을 입은 참석자들이 있으나, 표정은 너무 담담하여 마치 작품 가운데 있는 동네 개의 표정처럼 그냥 장례식이 있으니 참석했다는 담담한 표정들이다.
동네에 살던 사람의 장례식에 죽은 사람과의 어떤 인간적인 정감에 의한 것 보다 참석치 않으면 소속 집단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되거나, 아니면 주위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극히 형식적인 예의 차원에서 참석한 것이기에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는 슬픔의 표시가 없이 모두 자기의 생각에 젖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평균적 크기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작가의 고귀한 신념이 표현된 것이다.
쿠르베 이전의 회화에서는 모든 그림에 중심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위계적 질서가 엄연히 제시되게 마련이었지만 이 작품은 지극히 민주적이라고 할 만큼 모든 인물들을 평등한 차원에서 등장시켜 전체가 주인공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배하던 곳에서 오래 동안 정착된 십자가나 성직자는 항상 핵심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선 이런 전통과 인습이 깡그리 파괴되어 십자가도 성직자도 중심인물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수평적 차원으로 배치되어 평등성의 강조와 함께 민주적인 의식 구조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표현 작가 당시의 기존의 질서에 대한 대단한 충격적 도전이었으며, 도전은 매우 큰 모험이어서 주위 사람의 격렬한 반대를 받아야 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당시 권위 있는 예술 평가 기관이었던 만국 박람회에 전시하려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면서,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신념인 예술 표현에 있어서 예언자들이 받아야 했던 반대를 각오해야 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50명이나 되지만 동일한 곳을 응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쿠르베가 자신의 나라에서 지난 세기의 혁명으로 조성된 민주적 시민의 본질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그의 사실적 회화로 옮겨 놓았을 것이다.
작가의 전 세기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이 수직적인 군주제도를 무너트리면서 모든 사람의 평등성을 강조하는 민주적 사고방식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작가 역시 이 작품에서 어디에도 구심점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평면에 둠으로서, 작품을 통해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장례식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의 신선한 충격성은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 정착된 장례를 주제로 한 작품과의 차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6세기초 스페인의 화가 엘 그레고의 작품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은 전통적 교회 장례의 너무도 아름다운 면을 제시하기에 오늘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13세기 고귀한 삶을 살았던 오르가즈 백작의 생애는 환상적인 일화들이 첨가되면서 너무도 낭만스러운 주제로 정착된 것을 엘 그레코는 작품으로 남겼다.
이 작품에서 천상계와 지상계가 분명히 구분되고 오르가즈 백작은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스테파노 부제의 도움으로 그 영혼이 하늘로 옮겨지는 장엄한 모습이어서 마치 동양의 군선도를 보는 감동을 받게 된다.
백작의 생애는 경건한 면에서 천사와 같은 삶이었을 뿐 아니라,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덕을 실천하고 지역 교회를 아낌없이 도왔다는 완벽한 크리스챤 모델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작 배경에는 참으로 인간적인 탐욕과 야욕이 들어 있었다.
엘 그레코에게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오르가즈 가문이 아니었고, 1586년 당시 그 지역 교구의 본당 신부였던 안드레스 누녜스(Andrés Núñez de Madrid)였다.
어느 날 이 신부가 200 여 년 전에 작성된 오르가즈 백작의 유언장을 발견했는데, 이 유언장에는 백작이 이 작품이 있는 성 토마스 성당에 매년 거금을 봉헌하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지만 유가족들은 이것을 모르고 이행하지 않았다.
이 유언장을 발견한 사제는 탐욕이 생겨 백작의 유언을 실천함으로서 교회를 배불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작품을 성당에 남기면서 백작의 유언을 확인하고 공개하자는 타산적인 의도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과연 이 작품은 많은 선남선녀들에게 복음적인 감동을 준 일방 교회와 성직자들이 재산을 불리는 데 일조를 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사실주의에 대단한 신념을 표현한 것은 가장 순수해야 할 종교화에까지 인간적인 타산이나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포함되는 것을 보면서 작가다운 순수성의 표현은 바로 사실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확신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작가는 장례식의 풍경이라는 이 작품을 통해 과거 종교화처럼 어떤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인간이 현실을 어떤 선의의 동기로던지 왜곡하거나 과장할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확신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정확한 묘사가 바로 진리를 표현이라 확신했다.
작가는 일생을 건 작품 활동을 통해 사실성(Realty)이 예술을 통해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진리의 표현이라는 것이며, 인간 삶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는 평등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촌부의 죽음이 영웅의 죽음보다 못하다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복음적인 평등성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세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평등 사회였다. 가진 사람, 없는 사람, 늙은이 젊은이, 배운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등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불평등의 현실은 더 정착되고 심화되고 있다.
복음의 가치인 평등을 가르치는 교회 역시 제도적인 불평등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직자 평신도들의 교회 현실은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라는 복음 말씀을 너무 회화와 시키고 있다.
현실적인 교회 생활에서 “하느님 백성의 신학”이 이론적으로는 강조되고 있지만 이것을 믿거나 인정하는 사람은 좀 예외적인 모습으로 여겨지는 게 오늘 교회의 현실이다.
작가에 있어 사실성은 어떤 의미의 정직성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런 면에서 교회적 표현과는 전혀 무관한 이 장례식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평등과 정직성에 대한 교훈을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