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이들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은 자들은 위로하신다.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집회서는 오늘 회개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사순절이 곧 다가오기에 오늘은 죄의 회개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자비와 회개의 관계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그제 대구를 다녀오며 자비롭지 못한 저,
아니 너그럽지 못한 저를 많이 반성했습니다.
자비롭기까지는 못해도 너그럽기라도 해야 하는데
소리랄까 소음에 예민한 제가 한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받아들이다가
어제는 기차 안에서 내내 이런저런 소음 때문에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짜증에 발동이 걸리니 대구에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이것저것이 다 제 눈에 거슬려 속으로 투덜거리다 하루를 마쳤습니다.
어찌 저는 이렇게 자비롭지 못하고 너그럽지도 못할까요?
어찌 저는 모두가 제 마음에 들기를 바랄까요?
실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까지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왜 저 모양이냐고 투덜거리는 것일까요?
돌아오면서 그리고 돌아와서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한 것은
아직도 나 중심의 <싫고 좋음>이 너무 강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는
다른 차원에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집회서의 끝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나의 <싫고 좋음>이 아직도 강하고 그래서
이웃에 대해 제가 불만스러워하고 짜증을 내는 것도 분명 죄이고
너그럽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것은 더 큰 죄이지만
하느님 자비에 대한 죄가 이 큰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죄라면?
오늘 집회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감탄하는데
우리가 신앙인이기에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머리로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하느님 자비가 없어도 되는 양
하느님 자비에 무감각하게 산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에 대한 죄이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가 얼마나 큰지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사는 것이 하느님 자비에 대한 죄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기에 지금까지 부지하였는데
나는 그런 사실을 정말 알기는 하고 의식은 하는가?
자식이 부모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살 수 있었는데
그 무한함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랑을 모르고 살다가
돌아기시고 나서야 그 사랑을 깨닫게 되듯
나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거두시고 난 뒤에야
자비를 과거적으로 깨닫고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납니다.
하느님 자비를 과거적으로라도 느끼는 것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다행이라 하겠지만
실은 불행한 것이고 적어도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햇볕을 쬐고 화롯불을 쫴야지
지난날의 따듯했던 햇볕과 화롯불을 생각하며
지금 엄동의 한밤중에 벌벌 떨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를 과거적으로 느끼는 죄를 오늘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죄를 뉘우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