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받아 주소서.”
오늘 다니엘서를 그 역사의 상황으로 돌아가 읽으면
그 의미와 느낌을 제대로 그리고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청년은 포로로 잡혀 와 왕의 궁궐에서 살다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출세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니엘은 궁궐에 남고 세 청년은 바빌론 지역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아 갔는데 우상숭배의 칙령을 어김으로 고소를 당하고
왕의 명에 따라 불가마에 던져지며, 이 불가마에서 타 죽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늘 아자르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들의 죽음 앞에서 자기들의 삶의 역사를 얘기하지 않고
조상들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은 죄를 얘기하며
그래서 지금 희생 제사를 바칠 곳도 없고 지도자도 예언자도 없으며,
희생 제물도 없으니 자기들의 부서진 마음과 깨끗해진 정신을 제물로,
더 나아가서 자기들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여겨 받으시라고 기도합니다.
자기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제도 되고 제물도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우상숭배를 거부하였으니
자기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자비를 주십사고 청할 이유가 없지만
공동체를 대신해서, 아니 자기들이 이스라엘이 되어 자비를 청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독재자가 있습니다.
권리와 권력 면에서는 자기가 대한민국이라고 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국가에 충성하듯 자기에게 충성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책임과 의무 면에서는 무엇도 자기가 지려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내가 대한민국이라고 하지만 아자르와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의 죄가 바로 나의 죄이고,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기가 죽습니다.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겁니다.
그런데 아자르와 두 청년의 더 위대함은 공동체와의 일체화 그 자체보다
공동체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 앞에 나아간 것에 있습니다.
공동체의 죄가 나의 죄가 되어 그 죄를 내 죄로 고백합니다.
언젠가 본당에서 주일 미사 전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헌데 한 어머니가 고해소에 들어 오시자마자 통곡하며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너무나 대성통곡을 하여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울음이 그치자 ‘그래, 무슨 죽을죄를 지으셨습니까?’하고 여쭈니
‘이혼을 했습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혼? 목소리가 70은 넘어보였는데 무슨 이혼?
그 당시는 황혼이혼이 거의 없을 때였는데 뒤늦은 이혼을 했다는 건가?
그래서 제가 ‘연세가 지금 몇인데 이혼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하니
‘제가 아니고 제 아들이요.’하는 거였습니다.
그때 제가 그 죄는 아들이 고백해야지 왜 어머니가 고백하느냐고 하려다가
자식의 죄를 결코 자식의 죄만이 아니라 자기의 죄라고 생각하며 고백하는
어미의 사랑을 생각하고는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공동체의 죄를 자기의 죄로 생각하고 하느님께 용서청하는 모습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아울러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죄는 공동체의 공동의 죄인데 저는
그 죄조차 나의 죄가 아니라 너의 죄라고 돌리고 비난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돌아보며 뉘우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