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십자가 (1637)
작 가 : 인노첸시오 수사 ( Innocenzo da Parlermo : 1592- 1648 )
크 기 : 흑단목
소재지 :이태리 아씨시 성 다미아노 수도원
언젠가 어느 이태리 신부와 이태리인들의 탁월한 예술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에 그 신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이태리인들은 가슴이 뜨거운 민족이기에, 이것이 신앙으로 승화되면 성인이 되고, 예술 방면으로 승화되면 큰 예술가가 되고 , 악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마피아가 된다고 했다.
성인, 예술가, 마피아로 대변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이것이 이태리인들의 특성이라는 그의 견해는 실재 삶에서 많은 공감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태리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살았던 프란치스코 수도자였다. 그의 생애나 모든 활동이 변변히 알려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참으로 평범한 수도자였다. 당시 시칠리아에는 여러 공방에서 제조업 수준의 성물 제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작가는 자기 수도원에 있는 겸손이라는 뜻의 우밀래(Umil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기 동료 수도자를 스승으로 삼아 조각 기술을 익혔다.
이들의 수준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예술가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기의 신앙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수도자의 수행(修行)) 차원의 신앙 행위였다.
프란치스칸들은 기도의 시작 부분과 마침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는데, 작가는 바로 이 기도를 입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조각으로 바쳤으며 이것의 결실이 바로 작품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교회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 중심,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성모자나 다른 성인 상으로 전전하다가 십자가에서 종착역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작가는 프란치스칸 영성의 주요 주제인 우리는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따름”(성 프란치스코의 글) 이라는 신앙의 열망을 반추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외골수로 십자가 제작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여러 수도자들이 자기 수도의 결실인 십자가를 만들어 시칠리아와 이태리 본토에 수도원에 보급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전형적인 뜨거운 가슴을 지닌 시칠리아 사나이로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대단한 신심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자기 삶에서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수없이 제작한 십자가 작품 중에서 걸작에 속하는 것이며, 프란치스코 재속 회원으로 많은 신비 체험을 했던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다(Brigida di Svegia :1303- 1373)의 십자가 체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몰두해서 9일 만에 완성시킨 작품이다.
성녀 브리짓다는 스웨덴 왕족 출신으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남편 사별 후 수도생활을 시작했는데, 주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비체험을 많이 했으며 성녀가 창설한 수녀원은 특히 수난하신 예수님의 신비 체험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한번은 성녀가 환시중 주님께 수난 당하실 때 매를 몇 번이나 맞으셨는지 알고 싶어 물어 보았더니 주님께서 5,480번 맞았다고 하셨다. 이어 주님께서 "만일 네가 이 매 맞은 고통과 상처를 공경하고자 한다면 매일 주의 기도 15번과 성모송 15번을 바치고 이 15기도를 1년 동안 바쳐라. 이렇게 실천하는 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베풀어 주겠다." 고 하셨다.
이 주님 말씀은 단순하고 열렬한 심성의 인노첸시오 수사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작가는 이 신심 실천의 열매를 바로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예술 작품 이전에 그의 신앙의 결실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생존하던 시기는 프란치스칸 영성이 정화와 쇄신으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수도생활은 인간의 고귀한 인상을 신앙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허약한 성정 때문에 항상 일정한 성장기를 거쳐 안정기가 도달하면 안일한 생활로 수도회가 침체와 타락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뜻있는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 당시의 복음적 철저성을 살고자 하는 목표로 옵세르반테스(Observantes)라는 운동이 일으키게 되면서 프란치스칸들은 새로운 복음적 열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운동에 선두주자 역할을 했던 여러 수도자들은 오늘까지도 프란치스칸 삶의 자랑스러운 모델로 존경받고 있다.
작가는 옵세르반테스 전통에 속한 프란치스코 수도자로서 자기 삶의 열정을 오로지 십자가 제작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중세 교회에 큰 혁신의 생기를 주었던 성 프란치스칸 십자가 신학의 표현이었다. 그전까지 교회는 제왕적 성격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이 인간으로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 들였다는 것을 납득하기가 어려웠고, 또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기에 제왕적 성격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제왕적 성격의 그리스도는 새로 시작되는 교계제도의 당위성에도 힘을 줄 수 있었기에 더 강조되면서 그리스도의 존재성이 왕직의 표현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라도 화려한 옷을 입은 그리스도나 아니면 벗은 모습이라도 고통이 전혀 없는 표정의 예수가 대종이었다.
사도 바울로가 하신 다음 말씀을 교회가 받아들이기 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중세 프란시스코에 의해 강조된 십자가의 신학은 바로 이런 면에서 제왕적 교회, 수직적 교회에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형제로서의 예수를 드러내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 18)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제왕적 그리스도를 앞세워 복음과는 거리가 먼 권력투쟁과 사치한 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 체험으로 영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성 프란치스코는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면서도 실재 삶은 예수와 거리가 먼 그런 부패한 성직자들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이들의 가르침에 어떤 동조도 없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따름으로서 교회를 쇄신했다.
교회 부패의 원천이 되었던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정치적 술수, 단순하고 소박한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그런 현학적인 말장난에서 벗어나 신자들의 시선이 십자가를 향하도록 만들므로 교회에 예수의 생명이 소생하게 만들었는데, 작가는 바로 자신의 십자가 신앙 체험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후 마지막 장면의 묘사이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꽃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 28 - 30)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 본인이 원치도 않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극심한 고통을 끝내신 순간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이때 당신의 고통이 끝났다는 것 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는 데 더 의미를 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순간이나, 작가의 십자가 신앙은 바로 성부의 뜻을 완성하신 주님의 신앙을 너무도 아름답게 표현했다. 예수님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라 ,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평화, 기쁨, 평온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큰 고통 속에서 인생을 마감한 처참한 모습이 아닌 자기 사명을 다함을 확인한 인간의 충족된 평화와 안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주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의 얼굴은 볼수록 더 다양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작가는 이 얼굴의 표정을 통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삶이란 단편적으로 고통으로 이어지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인생도 맛볼 수 없는 열락의 삶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비 신학에서 강조하는 십자가의 감미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성녀 비리짓다가 환시 중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여러 번 만나면서, 십자가의 길이 쓰라린 의무가 아닌 영혼의 기쁨이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이런 형태의 작품은 여러 작가들에 의해 시칠리아 전체에 퍼지다가 이태리 본토에도 상륙해서 민들레 씨앗처럼 퍼지면서 많은 신자들의 열광적인 공경을 받게 되고, 어떤 것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작가는 통념적인 예술가라기보다 십자가 신앙에 몰두함으로서 이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당시 이태리 전역엔 여러 화풍의 화가들이 성화를 제작했으나, 작가는 예술가라고 부르기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에 심취한 프란치스칸 수도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을 나무에 남긴 것이다.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가라고 부르기보다 십자가의 신학에 심취했던 한 프란치스칸 수도자였다. 그는 작가로서 익힐 수 있는 기술적 기교 보다 자신의 신앙을 나무에 새김으로서 예술가가 줄 수 있는 것과 다른 신앙적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