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독서 지혜서는 역시 지혜서답게
사람 됨됨이를 식별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Test입니다.
시험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이 드러나듯
사람을 시험해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드러나고,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드러나며 속셈이나 속내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평범한 시험, 다시 말해서 어렵지 않은 시험은 변별력辨別力,
곧 뭣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지기에
어려운 시험, 난해한 시험일수록 변별력이 좋습니다.
오늘 지혜서에서 하느님의 적대자들은 사사건건 자기들을 반대하는 의인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인지 시험해보자고 하고
특히 그가 얼마나 온유하고 인내력이 있는지 시험해보자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임 드러나도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을 때는 누구나 좋은 사람 같고,
좋은 위치에 있을 때는 내 주위의 사람도 좋은 사람들 같지만
안 좋은 상황이 될 때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도 밑천이 드러나고 내 이웃도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자기가 만족스러워할 때에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이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만족스럽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때에 지니고 있는 만큼의
인내와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과 모욕은 어떤 사람인지,
곧 온유와 인내의 사람인지 아닌지 식별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유와 인내도 이 고통과 모욕의 단련을 받아야만 생깁니다.
시험이 바로 시련이고 단련이고 정련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이유는 평가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시험을 쳐야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잖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온유(친절)하다고 하였는데
이 온유한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해지려면 자기의 성깔이 다 죽어야 하는데
성깔이라는 것이 저절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10년 전만 해도 저는 아이들이 막 떠들면 못 견뎠고
지금도 강의 때 시끄럽거나 어수선하면 예민해져서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애를 키워보지 않았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이를 키우고 시끄러운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자기 성깔이 다 죽어
웬만하면 다 그러려니 하고 온유하게 되고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혜서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의 아들의 온유와 인내는
세파에 시달려 성깔이 죽고 겸손해진 그런 온유와 인내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온유와 인내는 사랑 때문에 온유하고 인내하는 그런 것,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에 의해 온유하고 인내하며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온유하고 인내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온유하지만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 그래서 이웃에게 불의한 것에는
결코 온유하지도 참지도 않으며 그래서 죽음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하느님 뜻에는 온순하지만 악에는 타협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