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과 함께 이번 부활 전례를 준비하면서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어떤 Concept로 할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 결과, 올해는 부활달걀을 주 주체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니 아마 6-7년 전
이 주제로 강론을 하였던 기억이 나고
그 때 강론이 너무 길어서 1부만 하고
2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마저 하기로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때 1부에서 했던 강론을 요약하면
새나 닭이 알을 아무리 품고 있어도
수정란이 아니면 생명이 부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하느님과의 거룩한 교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 되고,
Spiritual intercourse없이는 부화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2부에서 하려고 했던 내용이 그 유명한 啐啄同時입니다.
줄탁동시란 본래 선불교의 대표적 선문답서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啐啄同機(줄탁동기)”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 닭이 껍질을 쪼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안에서 병아리가 쪼는 줄(啐)과
밖에서 어미 닭이 쪼는 탁(啄)이 동시에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제자 혼자서 발버둥 쳐서는 안 되고
적절한 때에 스승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고,
스승은 그 때를 잘 알아 적절하게 깨우침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치려는 제자의 구도열망과 노력이 부족하고
적절한 때,
적절한 스승의 도움이 없으면 깨달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부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온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먼저 보겠습니다.
껍질을 깬다는 것은
지금까지 병아리를 가두고 억압했던 단단한 껍데기를 깬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병아리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껍질을 깨는 것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껍질을 깬다는 것은
단지 껍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는 것이고
그래서 존재의 파괴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은 병아리가 살아온 전부였습니다.
알이 병아리였고,
병아리가 알이었습니다.
그러니 알을 깬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세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고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와 거기에 길들여진 나를 동시에 깨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도록 지금까지
나를 낳아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사랑해준 모든 사람을 부정하고
당신의 사랑이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며,
마마보이의 근성을 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준
모든 사상 체계와 가치 체계와 믿음을 부정하고
거기에 기초한 나의 주장과 아집과 고집을 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나에게 만족을 주던 좋은 것들을
좋지 않다고 부정하고
거기에 길들여진 맛과 멋과 기쁨과 즐거움을 깨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깨는 작업이기에
무수히 시도하지만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거듭 실패를 하면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깬다는 것은 가능키나 한 일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다 자란 병아리는 더 이상 알에 머물 수 없고
알을 깨지 않으면 질식사할 것이기에 알을 깨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아리는 알을 깨 달라는 신호를 어미 닭에게 보냅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내가 나를 깰 수 없으니
밖에서 깨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금의 내가 죽는 것에 대한 수용이 있고,
현실을 초월하려는 초월의지와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자기 죽음의 수용,
현실 초월 의지,
새 생명에 대한 갈망,
겸손,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우리는 은총을 받을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입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의 몸짓입니다.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현실에 안주하여 초월할 수 없으며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새 생명의 환희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에
새 생명을 갈망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구도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새 생명의 은총을 내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우리의 약함을 자랑해야 하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관구 봉사자였을 때의 일입니다.
성대 종신서원을 한 형제들이 거의 매 년 한 명씩
수도원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는 형제들을 잡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니 역부족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들이 떠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저를 괴롭혔고
관구장인 제가 잘못 해서 다 그런 것 같은 죄책감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원망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도 다른 형제들과 같은 형제일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원망이지요.
어느 날 패배감, 무력감, 죄책감을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데
“주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힘이 다 빠졌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하는 소리가 마음을 넘어
입술까지 흘러나왔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가득하니까 도저히 가두어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 푸념에 놀라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물론 그때마다 그 형제를 위해 엄청 기도를 많이 하였지만
나의 노력에 대한 성공을 위해 기도를 하였던 것이지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맡기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능력에 맡기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려 그렇게 애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동안,
거기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나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저는 그때 비로소 병아리가 껍질을 쪼듯
하느님께 똑똑똑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제 안에서 죽어계시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나의 함이 죽을 때 하느님의 하심이 부활하고
나의 힘을 뺄 때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내가 죽을 때 하느님의 생명이 차 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도 한 때 지독한 하느님 부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회가 이상에서 빗나갈 때,
그리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때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의 미래를 놓고 큰 근심걱정에 쌓였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의 마음속에서 속삭이셨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는지,
이 수도회가 누구의 것인지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기에
언제 어디서나 계시지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근심 걱정할 때 거기에서 하느님은 죽어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형제회를 맡기고 나자
하느님은 프란치스코 안에서 다시 살아났고
프란치스코도 다시 평화와 광명을 찾았으며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다른 걱정하지 않고
처음에 자신이 받은
복음 선포의 소명을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어떤 Concept로 할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 결과, 올해는 부활달걀을 주 주체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니 아마 6-7년 전
이 주제로 강론을 하였던 기억이 나고
그 때 강론이 너무 길어서 1부만 하고
2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마저 하기로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때 1부에서 했던 강론을 요약하면
새나 닭이 알을 아무리 품고 있어도
수정란이 아니면 생명이 부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하느님과의 거룩한 교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 되고,
Spiritual intercourse없이는 부화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2부에서 하려고 했던 내용이 그 유명한 啐啄同時입니다.
줄탁동시란 본래 선불교의 대표적 선문답서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啐啄同機(줄탁동기)”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 닭이 껍질을 쪼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안에서 병아리가 쪼는 줄(啐)과
밖에서 어미 닭이 쪼는 탁(啄)이 동시에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제자 혼자서 발버둥 쳐서는 안 되고
적절한 때에 스승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고,
스승은 그 때를 잘 알아 적절하게 깨우침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치려는 제자의 구도열망과 노력이 부족하고
적절한 때,
적절한 스승의 도움이 없으면 깨달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부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온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먼저 보겠습니다.
껍질을 깬다는 것은
지금까지 병아리를 가두고 억압했던 단단한 껍데기를 깬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병아리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껍질을 깨는 것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껍질을 깬다는 것은
단지 껍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는 것이고
그래서 존재의 파괴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은 병아리가 살아온 전부였습니다.
알이 병아리였고,
병아리가 알이었습니다.
그러니 알을 깬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세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고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와 거기에 길들여진 나를 동시에 깨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도록 지금까지
나를 낳아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사랑해준 모든 사람을 부정하고
당신의 사랑이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며,
마마보이의 근성을 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준
모든 사상 체계와 가치 체계와 믿음을 부정하고
거기에 기초한 나의 주장과 아집과 고집을 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나에게 만족을 주던 좋은 것들을
좋지 않다고 부정하고
거기에 길들여진 맛과 멋과 기쁨과 즐거움을 깨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깨는 작업이기에
무수히 시도하지만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거듭 실패를 하면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깬다는 것은 가능키나 한 일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다 자란 병아리는 더 이상 알에 머물 수 없고
알을 깨지 않으면 질식사할 것이기에 알을 깨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아리는 알을 깨 달라는 신호를 어미 닭에게 보냅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내가 나를 깰 수 없으니
밖에서 깨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금의 내가 죽는 것에 대한 수용이 있고,
현실을 초월하려는 초월의지와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자기 죽음의 수용,
현실 초월 의지,
새 생명에 대한 갈망,
겸손,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우리는 은총을 받을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은총을 청하는 겸손함입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의 몸짓입니다.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현실에 안주하여 초월할 수 없으며
당신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새 생명의 환희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에
새 생명을 갈망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구도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새 생명의 은총을 내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우리의 약함을 자랑해야 하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관구 봉사자였을 때의 일입니다.
성대 종신서원을 한 형제들이 거의 매 년 한 명씩
수도원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는 형제들을 잡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니 역부족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들이 떠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저를 괴롭혔고
관구장인 제가 잘못 해서 다 그런 것 같은 죄책감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원망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도 다른 형제들과 같은 형제일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원망이지요.
어느 날 패배감, 무력감, 죄책감을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데
“주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힘이 다 빠졌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하는 소리가 마음을 넘어
입술까지 흘러나왔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가득하니까 도저히 가두어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 푸념에 놀라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물론 그때마다 그 형제를 위해 엄청 기도를 많이 하였지만
나의 노력에 대한 성공을 위해 기도를 하였던 것이지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맡기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능력에 맡기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려 그렇게 애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동안,
거기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나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저는 그때 비로소 병아리가 껍질을 쪼듯
하느님께 똑똑똑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제 안에서 죽어계시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나의 함이 죽을 때 하느님의 하심이 부활하고
나의 힘을 뺄 때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내가 죽을 때 하느님의 생명이 차 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도 한 때 지독한 하느님 부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회가 이상에서 빗나갈 때,
그리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때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의 미래를 놓고 큰 근심걱정에 쌓였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의 마음속에서 속삭이셨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는지,
이 수도회가 누구의 것인지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기에
언제 어디서나 계시지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근심 걱정할 때 거기에서 하느님은 죽어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형제회를 맡기고 나자
하느님은 프란치스코 안에서 다시 살아났고
프란치스코도 다시 평화와 광명을 찾았으며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다른 걱정하지 않고
처음에 자신이 받은
복음 선포의 소명을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사랑의 목소리로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알렐루야!!! 고맙습니다.
청출어람이청어람을 바라시는 좋으신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모든것을 저의 의지로 하지않겠습니다.
모든것이 다~아~ 주님의 것입니다.
기쁨도,고통도, 괴로움도 주님의것 입니다.
어제,김밥 맜있게 냠냠.......
부활계란 한 꾸러미..........Grazie!!!!!!!!!!!
도움을 청합니다. 밖에서 쪼아줄때에 맞추어 내가 죽어 내안에
주님이 부활하게 되는 날이 광명의 날입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이번 부활에 저의 작은 새로남은 진정 있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으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