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 6일 출발하여 2 주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모든 민족들>이라는 표현과
<증인>이라는 말이 마음에 특히 와 닿았습니다.
이번에 중국을 방문하면서 저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순례단과 함께 갔지요.
그리고 성주간 화요일에는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는 이사야서 말씀을 가지고
저희는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떠나기 전 많은 사람들이 사드 문제로 관계가 안 좋은데 왜 가냐고 했고,
순례단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듣고 그래서 걱정을 많이 안고 갔습니다.
아마 관광을 위해서라면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가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이 선교로 가는 것과 관광으로 가는 것의 차이입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와 다른 나라를 가보는 것이 관광이라면
주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도 얻도록 민족들에게 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쾌락/즐거움에나 머물러있는 사람은 선교하러 갈 수 없고
배타적으로 자기 민족주의에 갇혀 있는 사람도 갈 수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구원을 아직 체험치 못한 사람은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베드로가 대담하게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오늘 복음의 시작을 보면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할 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 의혹, 놀람 등에 휩싸여 있고,
그래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으며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대담하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그 사이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변화를 일으키신 것이고
오늘 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
마음이 열리자 구원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하신 것이고
구원이 열리자 세상을 향한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마음이 열렸을까요?
반대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의 마음을 여셨을까요?
아주 역설적인 것이지만 닫혀있었기에 열린 것이고
두려움과 의혹이 있었기에 주님께서 여신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공생활 3년 동안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병이 치유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랬지만 정작 그 구원을 주시는 주님이 속절없이 돌아가시자
그들의 믿음도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고 오늘 볼 수 있듯이
그들의 마음은 의혹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속절없이 돌아가셨기에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두려움에 차 있었기에
그런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때 무너진 믿음을 되살리신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주님의 죽으심으로 과거의 헛된 믿음을
허물어버리신 다음 올바른 믿음이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실 거라고 믿었던 주님이 죽으시자
그들의 믿음이 산산조각 났지만 그들의 그런 믿음은 죽어야 했던 것이고,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자 제자들의 진정한 믿음도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는 말씀을 믿었을 때는 물에 빠지지 않았지만
풍랑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의혹이 생겼을 때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한 믿음이 풍랑으로 인한 의혹과 두려움을 통과해야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같이 구원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