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 나오는 유대 지도자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떻게 보면 진퇴양난의 모습이어서 보기에 따라 애처롭기도 하고,
그 위선과 완고함이 대가를 치르고 있음에 고소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치유가 분명 하늘의 표징임을 알고 있고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고 분명히 얘기합니다.
제자들의 행위의 결과가 하늘의 표징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제자들의 행위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오늘 독서의 앞부분에 있는 얘기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보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도들이
자기들이 못 일으키는 표징을 일으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공부를 시켰는데도 주인 집 아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머슴 아들이 오가며 듣고 깨친다면 그걸 도저히 용납지 못함과 같은 거지요.
제가 실제로 비슷한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노무현 씨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한 신자를 만났는데
그분은 서울 대학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은 김대중 씨가 상고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데 이어
또 다시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을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표징을 자기가 무시하는 사람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함은
이들이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하자
제자들은 너무도 기가 차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똑똑하고 잘났다는 사람들이 그런 판단도 못하냐고 핀잔을 주는 것인데
세속적이고 교만함으로 인한 완고함이 이렇게 판단을 그르치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자들도 한 때는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불신과 완고함은 유식하건 무식하건
우리 인간의 공통된 고질병痼疾病이고,
특히 오래 살수록 고질이 된 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뭐든지 다 믿고 잘 믿던 인간이
믿음이 깨지는 경험을 너무 많이 그리고 오래 하다보면
믿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배어버리고 당연한 것이 되어
그렇게 굳어진 대로 완고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완고함은 오래된 불신이고
그 완고함은 좀처럼 깨기 힘든 것입니다.
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화석이 되고 나면
어떻게 바뀔 수 없도록 굳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랑마저 없으면
우리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완고해짐을 성찰하는 오늘이고
저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으니만큼 오래 형성된 부정적 완고함이
사랑보다 더 나를 좌우하고 있지나 않는지 경계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