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땅에 엎어졌다.”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회개하기 전에 바오로가 한 행위입니다.
다음은 회개한 다음에 한 행위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어제 묵상에서 하느님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는 것을 나눴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바오로 사도지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로 바오로를 이끄시지 않았으면
바오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을 계속 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께 돌아서는 행위는
바오로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수동태의 형태입니다.
엎어지고 싶지 않았는데 엎어졌으며,
듣고자 하지 않았는데도 음성을 듣게 되었으며,
장님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 것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회개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의 수동태가 필요합니다.
우선 엎어져야 합니다.
엎어지지 않으면 계속 그 길을 갈 테니 엎어져야 함은 당연하지요.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엎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실은 은총인데
문제는 이것이 은총이긴 하지만 은총의 완결이 아니고 서막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실패한 것일 뿐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것임을 모르면
그래서 실패를 패배주의적으로 받아들이면 은총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엎어짐에서 하느님의 역사를 봐야 하는데
즉시 이 하느님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엎어진 채 한동안 일어서지 못할 것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바오로 사도가 빛에 눈이 멀게 된 것에는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하느님으로 인한 새로운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게 희망이었던 것이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새로운 빛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모든 불이 껴져야하는 법이지요.
이에 당연히 또한 뒤따르는 것이 바로 식음을 전폐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이고 동시에 총동원 상태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케 하고 만족을 주던 것들은 다 끊어지고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걸고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과거와의 단절이 완전히 이루어져야 새로운 미래가 시작됩니다.
저도 바오로처럼 엎어진 적이 있었고 절망의 3년을 보낸 적이 있으며
그때 하느님 체험도 하고 새로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오로사도처럼 되지 못한 것은 이 식음 전폐의 단계를
너무 가볍게 건너뛴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영적 죽음의 강을 건너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세례로 심기일전 한 다음 다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게 되며
마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전존재적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 관계까지 바뀌게 됩니다.
우선 이웃과의 친교 관계가 달라집니다.
전에 친교를 맺던 사람들과는 단절하고
싫어하고 배척하던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박해하던 제자들과 같이 지내고
성 프란치스코는 친구들 대신 나환자와 가난한 이들과 어울립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지요.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이 때부터 주님의 사도, 주님의 종이 되고,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이 이제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시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