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것 참 듣기 거북하다고, 듣고 있을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리자
당신이 하늘로 올라가시게 되면 어쩔 거냐고 물으시며
오금을 박듯이 이렇게 한 말씀을 더 얹으십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에 참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떠납니다.
떠난 사람들이 그런데 누구입니까?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고 제자들이었습니다.
따르던 사람들이 이 말씀 때문에 당신을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나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는 것”(6,39)이라고
앞에서 기껏 얘기해놓고 이 말씀으로 대부분의 제자를 잃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을 하면 제자들이 떠날 것을 알면서도 왜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자기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자기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뜻이라면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것은 오늘 일로 진작 실패하였고,
오늘 복음의 예언대로 유다와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했으니 완전실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고,
자기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거고
그러므로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봅니다.
듣기가 거북하여 떠난 제자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까?
당장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떠났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나하고 비교를 하면 이 사람들이 더 진지한 태도를 지닌 것은 아닐까?
왜 이런 생각을 했는가 하면 저를 성찰해보면 어정쩡하기 때문입니다.
떠날 것인가, 따를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놓고 볼 때
저는 떠나지도 않지만 따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고 누구를 따라가겠냐고 베드로처럼 생각하지만
실제의 저를 보면 주님을 충실히 따르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지금은 베드로 사도와 같습니다.
머리로는 주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도 그러니 결코 떠나지 않고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어려움이 닥치면 따르지 않고 떠나는 저입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오늘 제자들처럼 주님을 버리고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따르지 않음으로써 결국 주님을 떠나는 겁니다.
주님이 싫거나 미워 배반하고 돌아서 떠나지는 않지만
아버지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따라 가지 않음으로서 주님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부끄럽고 한심하기도 하지만 희망도 가져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오늘 이렇게 말을 하고
결코 배반치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 따르지 못했고 배반도 했지요.
그러나 그런 베드로 사도였지만 결국은
주님을 따라 복음도 선포하고 순교도 하였잖습니까?
지금은 나를 따르기에 주님을 떠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지만
저도 언젠가는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희망을 해봅니다.
지금 따르느냐, 나중에 따르느냐 그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