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달리 얘기하면 이 세상에 오신 이분은 어떤 분이실까?
구원하려고 오신 분일까 아니면 심판하고 벌하려고 오신 분이실까?
이에 대해 당신은 절대로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르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보면 다르게 믿는 존재가 나옵니다.
다름이 아닌 더러운 영들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시자 이렇게 외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사람한테는 그렇게 되지 않지만 하느님께는 믿는 대로 됩니다.
사람한테는 믿는 대로 안 되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는 믿는 대로 되기에 주님께서는 내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런데 이는 이런 말도 되는 거지요.
주님을 구원자로 믿음이 너를 살렸다!
주님을 심판자로 믿음이 너를 심판했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빛으로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믿으면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올 텐데
빛으로 나를 단죄하러 오셨다고 믿으면
단죄하는 빛을 피하여 어둠 속에 머무르겠지요.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죄의 어둠을 감추고 숨으려는 사람에게는 빛이 단죄가 되겠지만
죄의 어둠을 드러내고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빛이 용서가 됩니다.
옷이 더러움을 탔습니다.
정말로 아끼는 옷이 그리 되면 어떻게든 원상복구하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별로 아끼지 않으면 그냥 처박아두거나 버려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그렇습니다.
나와 나의 인생을 정말로 사랑하면 죄를 씻으려고 할 것이며,
깨끗이 씻어지도록 자기 죄를 하느님 사랑 앞에 내놓을 것입니다.
다윗이 히쏩의 채로 내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라고 한 것처럼.
그러나 자기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죄는 덮어버리고 하느님이 아니라 어둠과 동거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책감으로 하느님 앞에서 숨은 것처럼.
원래는 죄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거듭 죄를 지어 자기를 포기하게 되면
그 때 죄를 덮으려고 어둠을 사랑하거나 사랑까지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어둠을 편하게 생각하고 어둠과 동거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죄 지은 나를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하느님 사랑의 내가 되지 않으면
나는 나를 얼마든지 포기하고 어둠과 동거할 것이며
빛도 하느님의 용서가 아니라 단죄로 오해케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