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오늘 주님께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처럼 사랑해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잘못 하고, 그래서 사랑의 실패를 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떤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다른 잘못된 사랑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까?
두 가지 인데 <자기 사랑을> <자기 식대로> 하는 겁니다.
우선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자기 사랑으로 사랑하려다 실패합니다.
<사랑을 하다>와 <사랑을 주다>가 같은 말이라면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랑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돈을 주고, 선이 있어야 선행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이 있다면 어떻게 있습니까?
저를 보면 어떤 때는 사랑이 있고, 어떤 때는 사랑이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느님처럼 사랑 자체이고 자체발광이라면
이럴 리 없을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신조어는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많이 쓰는 말이 자체발광自體發光입니다.
여성의 미모가 누가 띄우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화장을 안 해도 그 자체로 미모가 뛰어난 경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이 그런 것입니까?
내리사랑을 받지 않고도 사랑이 충만하여 사랑을 잘 할 수 있습니까?
심리학에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 받지 못하면 사랑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고,
더욱이 주님과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을 잘 받고 많이 받읍시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처럼 잘 받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 이방인 나환자들처럼 사랑을 잘 받도록 하십시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랑을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해야 하는데
자기식대로 사랑하기에 사랑이 잘못되거나 실패합니다.
자기식대로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기준대로, 자기 판단대로, 한 마디로 이런 경우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실까 생각지 않고 자기 나름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에 잘못되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려면
나름대로가 아니라 늘 하느님은 어떻게 하실까 의식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옛날 수련 전에 저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남에게 상처가 된 경우가 있었고,
그래서 제 곁에 아무도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랑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사랑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사랑 법>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도 제식대로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차이는 인정하면서 차별은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는 차이는 인정치 않으면서 차별하여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과 다릅니다.
우리는 똑같기를 요구하면서 사랑은 차이에 따라 차별하는 사랑을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할레를 요구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식의 신앙을 요구치 말라고 하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려주시니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차이는 인정하면서 차별은 하지 않는 사랑을 하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