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오늘 말씀은 잘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많습니다.
우선 <그날에>라는 말부터 잘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날>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시고,
그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날에>는 당신의 부재시不在時
곧, 당신이 더 이상 제자들과 안 계실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다른 협조가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으니
성령의 때를 말씀하시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떠나고 안 계시면 이제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청해야 하는데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있을 때 필요만 있지 청할 줄 모릅니다.
아주 어린아이는 뭔가 필요한 것이 있어도 청할 줄 모르는데
그것은 부모가 그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서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필요만 있고 청할 줄 모르는 것은 어린아이 때만이 아니라
어른이 돼서도 그럴 수 있는데 그것은 어른이 되어도 아직
자기가 스스로 청하지 못하고 남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애어른 인 것입니다.
어른이란 자기의 필요한 것을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청하는 것이라도 스스로 해야 하는데
애어른은 자기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할 줄도 모를 뿐 아니라
청하는 것도 자기가 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남자들의 경우 이런 애어른이 많습니다.
자기가 청해야 하는데 종종 아내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굽힐 줄 모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아쉬운 소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할 수 있는 것도 성숙함이고
청할 수 있는 겸손함이 있는 것이 성숙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날에>는 우리가 아버지께 청할 거라고 하시며
당신이 우리를 위해 대신 아버지께 청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십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청하되 당신 이름으로 청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직접 아버지께 청하되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이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친구 분에게 청할 것이 있으면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이것이 우리 가톨릭에서 얘기하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성과 우리의 직접성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대신 청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청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청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청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다르게 또는 가르침과 다르게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청하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해 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청하고, 사랑을 믿으며 청하고, 사랑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나의 욕심이 아니라 이웃과 나의 필요 때문에 청하되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청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청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