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오늘 토빗기는 자신의 많은 수입 때문에 의심을 받은 토빗의 아내가
토빗에게 선행의 대가로 얻은 것이 뭐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만의 토로라기보다는 토빗의 아내를 포함한 많은 이들,
심지어 상당수의 신앙인들도 던지는 질문이요,
얻는 것이 없다면 왜 선행을 하느냐는 의문의 표출입니다.
이런 의문과 질문에 대해 선행을 해야 한다는
착한 사람들이나 신자들이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는 선행의 보답으로 손에 넣는 이익은 없을지 몰라도
선행을 하고 난 뒤에 오는 마음의 뿌듯함/만족감이 보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익을 바라고 선행을 하는 것보다
마음의 뿌듯함을 바라고 하는 것이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순수한 선행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면에서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지요.
둘째는 현세에서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을지 몰라도
내세에서 천국을 상급으로 받게 될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얻는 것은 없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리라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도 하신 말씀이니 틀린 말이 아닐뿐더러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 될 겁니다.
하느님도 믿지 않고 죽고 난 뒤의 세계도 믿지 않는 사람, 그래서
현세의 보상을 바라지 죽고 난 뒤의 보상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답변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고 그래서 선행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선행은 미래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미 많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은이요 풍요로운 현재의 나눔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보상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미래의 보험 차원에서 하는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우선 보은 차원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현재의 자기가 있기까지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다고 생각하고
신앙인의 경우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이 많다고 생각할 때
그 보답으로 선행을 하게 되고 그럴 때에야 진정한 선행이 됩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바라는 것 없이 선행을 하게 되고
그래서 보상이 없어도 계속해서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풍요로운 나눔의 차원이어야 합니다.
사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고,
진정 풍요로움을 사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선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다 피땀 흘려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애써 모은 것을 대가없이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과분하게 자기가 받은 것이고,
자기는 지금 너무도 충분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마음에서 우러나와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보면 많이 가진 사람이 나누지 않고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누며,
많이 가진 것도
자기가 피땀 흘려 얻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눌 수 없고
거저 받은 것, 달리 말해 은총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야 나눌 수 있습니다.
선행은
보상을 위한 것도 아니고
미래의 보험도 아니며
보은의 행위임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