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토빗기는 토빗의 아들 토비야가 불행하고 억울한 여인 사라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한 여인을 불행으로부터 구제해주는 얘기인데
첫날밤을 맞이하여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이 누이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란 무슨 뜻일까요?
한 때 중광스님이라는 분이 있어서 그분과 얽힌 많은 얘기가 회자되었지요.
그중 하나가 한 여자를 불행으로부터 구제해주는 얘기이고,
말하자면 중광스님이 한 여인에게 육보시를 해주는 얘기입니다.
한 번도 남자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꼽추 여인,
한 번도 남자 품에 안겨본 적이 없어 불행하다는 여인에게
하룻밤의 사랑을 안겨준 얘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만한 사랑도 드물 겁니다.
이런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욕망을 초월한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호불호와 상대방의 미추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중광스님의 육보시가
순수함과 진실함 면에서는 오늘 토비야의 그 진실함과 같다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다른 면도 있습니다.
역시 신앙의 차원이지요.
토비야의 사랑은 성사적입니다.
토비야는 사라와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에 기도를 드립니다.
눕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 하늘을 같이 향하는 겁니다.
욕망뿐일 수도 있는 그 순간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고,
욕망으로 한 여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적으로 대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랑을 하도록 태어난 존재이기에 다 사랑을 하지만
참으로 여러 차원에서 사랑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순전히 성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사랑,
소유욕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사랑,
좋은 감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한 사랑,
친구들 간의 편하고 순수한 사랑,
같은 지향을 가진 동지적인 사랑,
민족적인 사랑과 민족을 초월한 사랑,
이렇게 인간의 사랑만 봐도 여러 차원이 있는데
성사적인 사랑은 그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입니다.
우선 그 사랑의 시작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내 사랑하는 그 사람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그 사람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 뿐 아니라
무릇 모든 성사적인 사랑은 다 이런 것입니다.
저희 수도원에서도 같이 사는 형제는 프란치스코의 유언대로
주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형제들입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사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일 뿐인 관구장의 인사명령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사적인 사랑은 다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하늘의 이슬이 풀잎에 살포시 내려앉듯
하느님의 사랑이 내게 내려와 지니게 된 사랑으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내가 택한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택한 사람만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맡기신 사람을
나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욕망이 아니라 성사적으로 사랑하기로 다짐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