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르코 복음의 부활기사는 불신의 보고서입니다.
다른 복음들보다 훨씬 간단하게 발현사실을 전하지만
두 번의 발현보고를 다 믿지 않았음을 간명하게 전합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보다 짧게 주님의 발현사실을 전하면서도
다른 복음에 없는 내용을 전합니다.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제자들이 기뻐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기뻐하는 얘기가 일체 나오지 않습니다.
불신의 결과는 슬픔입니다.
슬픔이란 무엇을 잃었을 때 오는 것인데
불신이 슬픔을 초래하는 이유는
불신하는 그 모든 것과 단절을 초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는 만큼 개방하고 그래서
믿는 만큼 소유하는데
불신하는 만큼
그 불신의 대상을 차단하고는
상실감에 머뭅니다.
다른 불신도 이렇게 슬픔을 가져오는데
주님 부활에 대한 불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슬픔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쇳덩어리와 시멘트 바닥이 아무런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싹을 틔우지 못하듯이
주님께서 꾸짖는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도
아무런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런 기쁨도 싹 틔우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복음들보다 훨씬 간단하게 발현사실을 전하지만
두 번의 발현보고를 다 믿지 않았음을 간명하게 전합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보다 짧게 주님의 발현사실을 전하면서도
다른 복음에 없는 내용을 전합니다.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제자들이 기뻐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기뻐하는 얘기가 일체 나오지 않습니다.
불신의 결과는 슬픔입니다.
슬픔이란 무엇을 잃었을 때 오는 것인데
불신이 슬픔을 초래하는 이유는
불신하는 그 모든 것과 단절을 초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는 만큼 개방하고 그래서
믿는 만큼 소유하는데
불신하는 만큼
그 불신의 대상을 차단하고는
상실감에 머뭅니다.
다른 불신도 이렇게 슬픔을 가져오는데
주님 부활에 대한 불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슬픔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쇳덩어리와 시멘트 바닥이 아무런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싹을 틔우지 못하듯이
주님께서 꾸짖는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도
아무런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런 기쁨도 싹 틔우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보다 쉬운 깨달음은 없을지언데
참 꽈배기 인생인지라 아직 어렵습니다여
더 믿음으로써 생명의 부활을 기쁨의 부활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