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분석해보면 주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들의 의로움을 인정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말씀을 보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결코.
그러니까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긴 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의로움은 하늘나라용의 의로움이 아니라
이 세상용의 의로움입니다.
약으로 치면 치료용의 약이 아니라 미용용의 약이거나
거짓 환자나 심리적인 환자에게 주는 거짓약과 같습니다.
의사가 보면 병이 없는데 자기에게 병이 있으니 약을 달라고 고집하는
사람이나 치매환자에게 약성이 하나도 없는 약을 준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왜 그들의 의로움은 하늘나라용이 아니고 이 세상용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늘나라의 의로움이 아니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허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하늘나라의 의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겸손한 의로움입니다.
겸손한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의 의로움을 지니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의로움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기만 의롭다고 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독선과 독단의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면
종종 다른 사람을 잘못을 태연히 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사람도 똑같거나 오히려 그가 더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겸손하지 못하면 저도 그렇겠구나 반성합니다.
그러나 겸손케 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옳음을 주장하거나
나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의로움과 비교하여
의롭지 못함을 뉘우치고 주님처럼 의로워지려고 할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의로움입니다.
사랑이 없는 의로움을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설사 있다 치더라도 그런 의로움은 이 세상에도 필요 없고
하늘나라에서는 더더욱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성을 내지 않고 이웃을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는,
그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제는 새벽 1시에 일어나 이지러지는 달을 보러 밖으로 나왔는데
누가 오토바이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밤에 이런 놈이 있다니. 다리몽당이라도 부러져야 정신 차리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즉시 기분이 몹시 찝찝해지는 거였습니다.
한 마디로 다른 때는 잘 피해 다녔는데 오늘은 똥 밟았다는 느낌이지요.
그는 어제뿐 아니라 매일 그렇게 성북동의 새벽을 불쾌하게 만드는 놈인데
다른 때는 그 소리를 듣고도 혀를 끌끌 차는 정도로 그쳤지만
어제는 그만 그의 불쾌한 짓에 감정적으로 가담한 겁니다.
성/화내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그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성내는 그 순간 그 자체로 나에게 지는 것이고,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추락하는, 하늘나라의 사랑을 잃는 패배를 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의로움을 얻으려면 그런 놈을 보고도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