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바로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여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나도 이 <우리>에 들어가고, 우리도 이 <우리>에 포함되는 걸까요?
그런데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절이 될 수 있는가?
그것도 보통 사절이 아니고 화해의 사절을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나 자신도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화해를 권하는 화해의 사절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하느님과 화해라고 권고하는 화해의 사절이 아니라
화해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들어야 할 사람이지요.
지금은 제가 하느님과 화해할 일이 없지만
옛날에는 화해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옛날 저는 저의 인생을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까지 없었고 그래서 가난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못 생겼고 키도 작았습니다.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를 이런 가정에 태어나게 하시고
저를 이런 저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 하느님이시기에
저는 하느님을 원망했고,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크면서 하나하나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가난이 불쌍하게도 불행하게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불쌍하게 하고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 불행이라는 점을.
아니 불행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아버지가 없어서 고생은 했어도 불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래서 더 강한 사람이 되었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게 되었음을.
못 생기고 키도 작은 것 사실이지만 키 크고 잘 생긴 것이 행복이 아니라
덕이 있고 품은 꿈이 큰 것이 오히려 행복한 것임을.
그런데 이것을 깨달은 후에는
제가 하느님을 원망치 않음은 물론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것은 사실은 자신과 화해하고
자기 인생이나 운명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가 어떻게 깨달았겠습니까?
이것을 깨닫게 한 것이 바로 주님의 복음이고 프란치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케 되었고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화해케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길 가던 중 강도를 만나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지체치 않고 ‘나는 위대하신 왕의 사신’이라고 대답을 했지요.
프란치스코가 위대하신 왕의 사신이 되었다면 우리도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나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통하여 참 행복의 비결을 깨닫고,
그래서 복음이 행복의 비결서임을 믿는다면 우리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사절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통해 화해의 복음을 전하시게 되겠지요.
겸손한 것은 좋지만
겸손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절도, 화해의 사절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고, 주님의 임명장을 거부하는 무도함일 뿐입니다.
임명장까지 거부하는 그런 겸손한 사람은 되지 말고 사절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