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은 왜 길을 떠났을까?
주님이 떠나라고 해서 떠난 거로 창세기는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제가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물론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신다고
길을 떠나지 않으니 왜 떠나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지요.
더욱이 아비와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창세기는 12장인데 앞 선 11장에서 아브람의 아버지 테라가
가족 모두를 데리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눌러 앉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라고 하셨는지 스스로 가려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 테라는 가나안까지 가려다가 하란에 안주한 것임에 비해
아브람은 안주하지 않고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테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굳이 가족까지 버리면서 하란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란이 살기 힘들거나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버지 테라가 주저앉은 것을 보면 오히려 살만한 곳이었지요.
그렇다면 하란을 떠난 것은 더 나은 것을 찾아서 떠난 겁니다.
그런데 가나안이 더 나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뿐 다른 것은 일체 없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면 지금 늙은 나이인 자기에게 후손을 주시고,
복을 주실 뿐 아니라 남에게도 복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과 약속 외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아브람은
그것을 믿은 것이고 그 약속을 믿고 떠난 것입니다.
오늘 제가 복음 말씀을 제쳐놓고 아브람의 가나안 순례를
강론 주제로 잡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 달 저와 포르치운쿨라 행진단은 또 길을 떠날 계획인데
우리는 왜 편하고 안락한 집을 떠나고 왜 생고생을 합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나 목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주님을 충실히 따랐던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을 따르고
그리고 오늘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따랐던 아브람처럼
천국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 행진에 도전하는 분들이
아브람처럼 대부분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작년에는 82세 되신 분이 함께 걸으셨고 70대도 많았는데
사실 나이가 많을수록 안주하기 쉽고 건강도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고 그렇기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이 먹은 사람이 젊은 사람들보다 길 떠나는 도전을 더 하는 이유가
직장에 안 다니고 그래서 시간이 더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저무는 인생이기에 인생의 의미를 더 절실히 찾아야 하고
회광방조라는 말처럼 남은 인생을 더 절실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광반조廻/回光返照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지막 불꽃을 팍 태우듯
사람도 죽기 전에 정신이 맑게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한다는 뜻도 있고,
불교에서는 밖이 아니라 자기 내면 성찰을 잘 함으로서
진실한 자기, 곧 불성을 찾으라는 뜻도 있는 말이지요.
길 떠나는 주님께 부자가 달여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을 잘 사는지 묻자 잘 지키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잘 지키고, 착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느냐 마느냐 이것인데 아브람은 그것을 75세에 한 것입니다.
75세란 늙은 나이이지만 주님을 따라 길을 떠나는 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75세에 길 떠나는 의미를 회광반조에 비춰 되새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