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가는 인생이고 그래서 하나의 여정입니다.
우리말은 참으로 독특해서 이런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말들은 그저 산다고 얘기하는데
우리말은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살고 또 한편으로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배를 타고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배 안에서 먹고, 자고, 얘기하고, 고기 잡고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배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가긴 가는 것인데
살아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살아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독서들은 우리가 살아갈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주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돈을 쫓아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권력을 쫓아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미녀를 따라가면 죽게 되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살 수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쫓으면 죽지만
주님을 따르면 삽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쫓으면 왜 죽습니까?
그것들은 끝이 있고,
그 끝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이런 것들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끝을 보고서야 절망하고 돌아서 갑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긴 따랐는데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의 실패자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출세를 꿈꾸었던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패하고 낙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따라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몸소 다가가시어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따라가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다가오시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시며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십니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시며 그 말에 동감하기시도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가는 길에 동행하시고,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시고,
그들의 말에 동감하시자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고픈 마음이 생기고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합니다.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주님을 붙들고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하며 감동을 서로 얘기합니다.
주님의 동행이 마중물처럼 제자들의 동행을 이끌어내고
주님의 동감이 마중물처럼 제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저의 관구 봉사자의 가상공간 이름이 마중물인데
마중물이란 펌프에 물이 빠졌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처음에 붓던 물이지요.
펌프에 물이 빠지면 아무리 물을 길으려 해도
물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때 꼭 필요한 것이 마중물인데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도 물 건너가고
기쁨과 희망도 사라지고
힘도 쏙 빠진 제자들에게
마중물처럼 필요했던 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동행,
동참,
동감이
바로 그때 그 제자들에게 필요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의 입에서
마침내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듯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는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우리말은 참으로 독특해서 이런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말들은 그저 산다고 얘기하는데
우리말은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살고 또 한편으로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배를 타고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배 안에서 먹고, 자고, 얘기하고, 고기 잡고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배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가긴 가는 것인데
살아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살아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독서들은 우리가 살아갈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주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돈을 쫓아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권력을 쫓아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미녀를 따라가면 죽게 되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살 수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쫓으면 죽지만
주님을 따르면 삽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쫓으면 왜 죽습니까?
그것들은 끝이 있고,
그 끝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이런 것들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끝을 보고서야 절망하고 돌아서 갑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긴 따랐는데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의 실패자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출세를 꿈꾸었던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패하고 낙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따라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몸소 다가가시어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따라가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다가오시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시며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십니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시며 그 말에 동감하기시도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가는 길에 동행하시고,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시고,
그들의 말에 동감하시자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고픈 마음이 생기고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합니다.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주님을 붙들고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하며 감동을 서로 얘기합니다.
주님의 동행이 마중물처럼 제자들의 동행을 이끌어내고
주님의 동감이 마중물처럼 제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저의 관구 봉사자의 가상공간 이름이 마중물인데
마중물이란 펌프에 물이 빠졌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처음에 붓던 물이지요.
펌프에 물이 빠지면 아무리 물을 길으려 해도
물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때 꼭 필요한 것이 마중물인데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도 물 건너가고
기쁨과 희망도 사라지고
힘도 쏙 빠진 제자들에게
마중물처럼 필요했던 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동행,
동참,
동감이
바로 그때 그 제자들에게 필요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의 입에서
마침내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듯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는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Come.!!!!!!!!!
Follow me.!!!!!!
오직,주님만을 영원이 따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