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제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같이 깨어 기다리는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얘기를 했고
오늘은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깨어 기다림에 대해서 얘기했음에도
오늘 또 열 처녀의 깨어 기다림을 굳이 이야기 하는지,
왜 남자가 아니라 처녀의 기다림을 얘기하는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어제도 종의 슬기로움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오늘 처녀들의 슬기로움은 종의 슬기로움과 어떻게 다른지도 봤습니다.
분명 두 비유의 깨어 기다림은 다르고, 슬기로움도 다릅니다.
종의 깨어 있음과 슬기로움이 위계적이고 일적인 관계에 터하기에
그래서 충실함이 슬기로운 것이라면
처녀들의 깨어있음과 슬기로움은 수평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 터하기에
그래서 사랑에 깨어있음이 슬기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이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것은 시킨 일을 충실히 하기 위함이지만
처녀가 신랑에게 깨어 기다리는 것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고
바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함이기에 신랑을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신랑이 오면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선 보고픈 마음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갈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봤으니 이제는 안 보고 싶고 안 봐도 된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거나 사랑이 별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움/갈망은 사랑의 표시이고 관상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사랑 없이 맞이하는 것은 보고 싶지도 기다리지도 않다가
신랑이 오니 무덤덤하게 맞이하거나
여관 주인이 손님 문 열어주는 것처럼 의무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은 예쁘게 하고 맞이하는 겁니다.
여자가 아니고 여자와 같이 살지 않는 제가 보기에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꺼져버린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 아가씨들을 보면 화장 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런 자기를 제가 보고 있는 것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충분히 화장을 했는데도 화장을 하는 것을 보면
화장이 부족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화장이 곧 사랑이고
화장을 하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 곧 사랑 행위인 것입니다.
아하, 화장이 사랑이구나!
이것을 알고 나니 전에 화장을 하고 또 하는 아가씨를 보고
안 좋게 보거나 한심하게 보던 저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대충하는 여자를 볼 때 혹시 사랑이 꺼진 것이 아닐까
쓸 데 없는 생각도 하였는데 겉치장으로서의 화장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클라라 성녀가 얘기하듯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덕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화장을 해야겠지요?!
그러니 사랑을 않는 미련한 처녀는 어떻게 주님을 맞이하겠습니까?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 머리는 산발인 채 주님을 맞이하겠지요.
그런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어야겠습니다.
깨어 기다리는 종은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어여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