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마태오사도 축일에 복음은 마태오사도가 부르심 받음에 대해서,
그리고 독서는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감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부르심 받았다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마태오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진짜 받았는가?
아마 우리 모두 진지하게가 아니라 건성으로 대답한다면
‘그럼 부르심 받았지. 주님께서 나만 빼놓으시겠어?’하실 겁니다.
그런데 나만 빼놓지 않으셨을 거고, 그래서 부르셨을 거라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님께서 부르셨냐고 물으면 대답치 못하고
부르셨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대답한 것임이 드러날 겁니다.
저는 저의 부르심에 대해 가랑비에 옷 젖듯한 부르심이라고 하지만
그런 부르심을 받고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성소를 포기하고 떠난 뒤
1980년 저희 집에서 복음을 읽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다시 받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르심을 명확히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를 부르시고,
어렸을 때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서 부르셨지만
부르심의 체험을 인격적으로 한 것은 그때 복음을 통해서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어떤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부르심 체험을 하기 전에는
수도생활과 사제직에로 부르심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실은 주님께로 부르심 받은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그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구구하게 살려거든 나를 따라라, 완전해지려거든 나를 따라라,
뭐 이런 식의 따라야 하는 다른 이유를 대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처음으로 이 인격적 따름의 참 모습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갈 다른 누구도 없고, 해야 할 다른 일도 없으며,
따로 이루고픈 목표도 없이 오직 엄마와 함께 있음,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목표이며 그래서 따라가는 겁니다.
모름지기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와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이도 어른이 되면 사명, 소임, 일이 주어지듯
주님과 함께 있으며 사랑의 양육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각자에게 원하시는 곳과 소명에로 파견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예언자로,
어떤 이는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는 교사로 부르심 받고 파견되지만
그러나 모두 다 사랑하는 분의 사랑의 파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란 크게 두 가지입니다.
Being과 Doing, 곧 마리아와 마르타처럼
<주님과 함께 있음>과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에 합당치 않게 살아가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주님은 빼놓은 채 주님의 일이랍시고 하는 것이요,
주님하고만 있겠다고 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떤 부르심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