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또 바리사이 집에 가시고
그리고 또 안식일에 가시는데 그러나 오늘은 관점이 다릅니다.
안식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위아래와 관련된 것입니다.
초대되어 온 바리사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보고
왜들 그러느냐고 비유를 드신 다음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 세상의 권력 다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내가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남을 끌어내려야만 하는
그런 자리다툼에 말려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수히 보지 않습니까?
올라갔다가는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내려오지 않으면 끌려서라도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두 번째로는 심리적인 차원이며 덕의 차원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는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고,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지요.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사실 위아래의 관념이나
우열의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풍랑에 까불리는 낙엽처럼
다른 사람의 대우에 따라 자존감이 마구 흔들리지요.
그래서 우대를 받으면 우쭐하고 기고만장하기도 하고
박대나 냉대를 받으면 아주 초라해지고 비참해지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이렇게 다른 사람의 대우에 따라
위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사람이 높아진다는 말씀의 두 번째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더 깊은 의미의 차원이 있습니다.
사랑의 차원이고 육화의 차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차원입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
곧 신성을 지녔지만 인성을 취하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 것이
바로 예수(인성)+그리스도(신성)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느님이신 분이 왜 인간이 되시고 종의 신분을 취합니까?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더 정확히 얘기하면 사랑 때문이지요.
전능하신 분이 인류의 구원만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 오지 않고도 그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말씀만으로 창조하신 분이
있는 것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화는 겸손이기도 하지만 사랑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사랑이지 겸손이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사랑 때문에 오지 않고 구원을 위해서만 오셨다는 것은
자녀가 감옥에 가 있을 때나 아플 때만 부모가 자녀를 찾아가고
혼자서 잘 살고 있을 때는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므로 필립비서가 얘기하듯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낮출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하늘로 그리고 신성으로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에서 혼인잔치에 초대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라고
우리에게 권고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