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보답을 바라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보답을 바라며 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사랑이 참 사랑이라면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면 참 사랑은 보답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고,
참 사랑이 보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보답이 되기 때문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보답이 됩니다.
참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 자체로 너무도 큰 만족이 되지요.
예를 들어서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여고생이 매일 꽃을 교탁에 갖다 놓아도
선생님은 그것이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 모르고 그래서 보답해주지 않지만
여고생은 선생님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기에 계속해서 그것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좀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지요.
사랑이 사랑의 보답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보답이기 때문이라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이 사랑의 보답이라는 말이나
하느님이 사랑의 보답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 되는 거지요.
하느님이 실로 친히 우리의 보답이 되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러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준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슬며시
사랑이시고 가난한 사람이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고
그럴 때 우리는 인격적인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보답치 못해도 주님 친히 보답이 되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죽고 난 뒤에나 보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바로 보답을 바라기에
바로 보답해줄 수 있는 친구나 부유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실천하고
그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이런 미래의 약속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 주님은 왜 이런 식으로 보답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우선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이 강한 사람은 현재의 보답이 없어도 미래희망을 믿습니다.
심리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가리기 위해
심리학에서 간단하게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반드시 둘 다 먹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맛있는 것을 먼저 먹고 어떤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둘 다 먹어야 한다면 맛없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건강하고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약하고 어릴수록 당장의 좋은 것을 택합니다.
당뇨환자가 당이 떨어지면 쓰러지기에 당장 당을 섭취해야 하듯
당장의 만족이 없을 때 너무도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은
나중의 만족은 생각할 여유가 없기에 당장의 만족을 취합니다.
두 번째는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이고
영원한 보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장의 보답은 순간의 보상이기에 영원할 수가 없지요.
자주 말씀드리듯 영원이란 영원한 현재이니 종말론적이고 영원한 보상은
미래의 보답을 앞당겨 현재적으로 사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