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언제부턴가 저의 청원기도가 단순해졌습니다.
옛날에는 청원의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읊으며 그걸 주십사고 하였는데
이제는 그저 자비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에게,
어떻게 해주는 게 좋은지 더 잘 아시는 분에게
무엇을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주제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자비를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비 이상으로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 번 봅시다.
어린애가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라 그것을 사주면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갖게 된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지요.
거기서 엄마의 사랑은 전혀 못보고,
나를 사랑하는 엄마는 안중에도 없을 수 있습니다.
간혹 요즘 아이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 우리는 끔찍한 이기주의라고 개탄을 하지만
이런 이기주의를 보고 개탄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왜 안 됩니까?
우선 사돈 남 말 하듯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아이들처럼 이기주의적일 수 있는데
필요한 것만 보고 하느님과 사랑을 못 보며,
욕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이기주의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이기주의적임을 겸손하게 인정한다면
그래서 욕심 대신 사랑을 지지고 있다면
이제 연민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개탄만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진정 연민의 눈을 가졌다면 화가 나지 않고
너와 나의 이런 이기주의가 불쌍한 보게 될 것입니다.
필요한 것만 보고 사랑을 못 보는 것,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
이게 사실 제일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고,
이것이 불행임을 보지 못하는 것이 또한
불행이요 그런 사람이 진정 불쌍한 사람이지요.
자신의 불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맹인입니다.
곧 그 불행이 사랑과 하느님을 보지 못함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맹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맹인은 다시 보게 되면서
하느님도 만나게 됨으로써 영적으로도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시고,
맹인은 예수님을 통해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임을 알아 뵙고 고백하며 따라나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문을 해봅시다.
육적인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인가, 영적인 시력을 갖는 것이 행복인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 행복인가, 하느님을 보게 되는 것이 행복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인가,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