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축일을 지내며 저는 뭘 얘기해야 할지 사실 난감합니다.
저는 마리아에 대해서 다른 얘기는 많이 할 수도 있지만
마리아가 자신을 봉헌하셨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가
너무 끼어 맞추기식으로 축일 하나를 또 만들었다는 느낌이 큽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성모님의 축일은 다 아드님의 축일과 쌍둥이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 성모 통고 축일을 지내고,
예수 성탄 축일이 있으면 성모 성탄 축일도 있으며,
예수 승천 축일이 있으면 성모 승천 축일이 있듯이
예수 봉헌 축일에 상응하는 축일이 바로 오늘의 축일인 거지요.
오늘 축일은 복음에는 전혀 근거가 없고 전승에 근거한 것인데
세 살 때 부모에 의해 봉헌되었다는 전승에 근거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전승은 굳이 믿을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축일을 굳이 지내는 것은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가 마리아를 봉헌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이 자신을 봉헌한 것을 기리자는 것이기에
세 살이 아니라 판단과 결심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마리아가
스스로 자신을 봉헌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봉헌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봉헌해야 하는 것이고
마리아처럼 스스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는 봉헌기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주님 백성의 기도와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사실 요즘 제가 많이 느끼는 것은 사랑이 많이 타락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 탓이나 하고 젊은이들 탓이나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저도 그렇고 요즘 사람 대부분이 사랑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을 내어줄 줄 모르는 사랑, 다시 말해서
자신을 봉헌하는 사랑을 잘 하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봉헌생활을 하겠다는 수도자들마저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신을 내어주기보다는
자기 것을 많이 챙기고, 자기를 엄청 챙깁니다.
그러니 사랑은 엄청 좋아하기에 사랑하고 싶어 하면서도
좋아서 하는 사랑은 해도 바쳐서 하는 사랑은 못하는 거고
그래서 사랑이 타락되었다고 저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헌데 거듭 얘기하지만 이것은 누구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고
요즘 시대가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옛날엔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칭송하던 문화가 있었는데
그 칭송에는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던 폐습도 있었기에
요즘 와서는 아예 희생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게 된 것이지요.
강요된 희생을 없애려다가 자발적인 희생마저 없어진 겁니다.
그렇습니다. 가미가제를 미화하며
또 다른 가미가제를 만들려는 일본 군국주의식의
희생 강요의 문화는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자신을 봉헌하는 사랑은 기려져야 마땅합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달을 받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때 수락한 것이 아니라
그전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든 순종하기로 이미 자신을 봉헌했기에
전갈을 받자마자 즉시 주님의 종이니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런 면에서 볼 때 봉헌이란 준비된 순종이고
참 사랑이란 준비된 희생 곧 자헌의 결과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