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현재만 보고 그것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비해
주님은 그것의 허무를 보고 영원 안에서 현재를 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주님의 따듯한 눈과 우리의 허영의 눈을 얘기하였지만
오늘은 제목을 <허무를 볼 수 있는 눈>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허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주의자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허무주의자는 허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허무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함은
이런 허무주의자와는 정 반대로 허무를 볼 줄 모르는 사람,
곧 이 세상 것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허무를 보는 것은
허무를 보되 이 세상의 허무를 보는 것이고
허무 너머의 영원을 보는 것이며
영원 안에서 허무를 보는 겁니다.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인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묻는 사두가이에게
죽고 난 뒤에 그런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없어질 거라고 하시면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죽었어도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하느님 안에 있으면 죽었어도 살아있는 죽음이고,
하느님 안에 있으면 순간도 영원한 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것이 영원할 것 같아도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허무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과감하게 이런 생각까지 합니다.
허무와 허무감은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마련한 악惡이자 약藥이라고.
이 세상 것들이 허무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에서 허무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을 찾지 않고 계속해서 허무한 것들에 헛물을 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허무와 허무감은 영원을 찾게 하는 마중물이기도 합니다.
이 허무와 허무감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