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림절의 첫 날 첫 독서는 이사야서이고 한 구절이 이렇습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대림절 첫날 첫 독서로 이것을 읽을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고,
그러니 잘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하는 독서를 읽어야 할 텐데
왜 주님을 만나러 주님이 계신 산으로 올라가자는 독서를 읽을까?
사실 주님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시는데
우리가 주님이 계신 산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길이 엇갈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의 전례가 의도하는 바를 잘 읽어야 하겠습니다.
<야곱의 하느님의 집>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잘 모셔 들인 집입니다.
그래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집밖> 사람들도 모여들게 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그 구성원끼리 막가는 집을 비난하며
“도대체 저 집안은 어쩌자는 거야?”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자기가 자기 집 구성원을 비난할 때는
“도대체 이 집구석은 왜 이 모양이냐?”고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 집 안이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집안>이어야
우리 집 밖에 있는 다른 집안사람들도 모여 든다는 말씀이고
우리교회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평화로운 <하느님의 집안>이어야
하느님을 믿지 않던 이민족들도 하느님 집으로 몰려오게 되리라는 거지요.
그리고 그 예로서 복음은 이민족의 백부장이 주님을 찾아옴을 얘기하고요.
쉬운 예로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수도회들은 성소자들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수가 줄어서 어쩔 수 없다고도 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수도성소고 결혼성소고 다 싫고
혼자 살려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교회와 수도회가 참으로 멋진 하느님의 집안이었다면 몰려올 겁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와 수도 공동체가 <하느님의 집안>이 아니라
하느님이 없는 집안이고 하느님이 주인님으로 안 계시기에,
그리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기에 있던 사람마저 떠나는 형국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오셨지만 우리가 모셔 들이지 않아
우리 집밖에 계시는 주님을 백부장처럼 집안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오늘 백부장은 주님께서 네 집에 가서 네 종을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거절이 아니라 사양이고,
싫은 것이 아니라 정말 영광이지만 모실 자격이 없다는 겸손이지요.
오시겠으면 그럼 오시라고 하며 그저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오시라는 것보다 더 오시기를 바라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겸손한 사양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 전례는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민족인 백부장이 이러할 진데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오실 테면 오라는 식으로 기다려서는 안 되지 않느냐,
오시건 말건 전혀 상관없다는 식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되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앉아서 맞이하지 않고
맞이하러 나가는 것이 기도이고 주님의 산으로 올라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대림절 아침 우리는 매일 하는 초대송을 새로운 마음으로 하십시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